피히테의 지식론은 곧 “절대적이고 실천적인 자아와 지적인 자아(이론적 자아)간의 참된 통합점”의 추구라고도 볼 수 있다. “이성은 그것이 실천적이 아닌 한, 이론적일 수도 없으며, 인간 안에 실천적 능력이 있지 않는 한, 인간 안에 어떠한 지성도 가능하지 않다. 모든 표상의 가능성은 그러한 실천적 능력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욕구가 없이는 도대체 어떠한 객체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제시되는 것이다.”
존재, 그 자체가 악이다.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 때문에 죄지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의 유한성 자체가 악(惡)인 것이다. 우리의 정신 또는 우리의 자아가 유한하기에 그 자아의 행위가 악하다. 유한성이 악인 것은 그것이 제약된 것으로 특정한 내용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 헤겔
절대정신은 유한한 정신에 대립된 무한한 정신이 아니며, 유한한 정신 역시 그 유한성을 고집하여 무한성의 타자로서 남겨져야 할 그런 정신이 아니다. 자아는 이 두 자아의 통일이며 대립니다. 자아는 자신의 동일성 안에 그 이원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개체적 자아 안에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유한한 개체의 의식은 자신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직관한다. 이렇게 해서 의식은 보편성을 지닌 정신이 되는 것이다. - 헤겔
인간의 본질은 절대적 유한성이나 절대적 무한성이 아니라 유한성 속의 무한성, 무한성 속의 유한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명제는 침묵을 언급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언어적 서술이나 규정을 초월하는 비언어적 앎의 가능성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칸트를 거쳐 후설에 이르는 초월 철학의 가장 큰 오류는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말했다는 것인가? 철학이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자기 모순의 외침일까?
그러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알기는 하되
단지 말할 수 없을 뿐이라는 달콤한 자기 위로가 아닌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너무나 많은 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언제 잠에서 깰 수 있겠는가?
활동성, 주객 미분의 어떤 활동성,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활동성이란,
무한한 변화가능성, 연기공성, 연기법, 인연법, 인과법을 말하는 것 아닌가?
무아, 무상, 일체개고, 열반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