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이면 밖을 서성이게 된다. 사방이 밝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월의 낮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계속, 계속 보고 싶을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면 나뭇잎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가끔 세상을 잊게 만든다.
그런 낮이 길어지는 여름, 표준의 정시를 한 시간 앞당기는 ‘서머타임’. 그 시간에 일어난 세상의 혁명이 있다. 군사적 독재 정치를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6월 민주 항쟁’이 그것이다. 창비의 신간 ‘1987 그날’은 그 시기를 다룬 만화다.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가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이 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더 이상 죄지음의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혜진’이 마지막으로 적어두고 세상을 떠난 이 편지가 책 속에서 발화했다.
그는 정권이 공권력을 앞세워 자행한 민주 항쟁 사건의 피해자다. 당시 투항하던 여성들을 향한 고문은 남성에게 행해진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행되었다. 1986년 '성남 경찰서 장미경 사건' '부천 경찰서 성 고문 사건' 1987년 '파주 여자 종합고 성폭력 사건'등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성폭력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낸 2996일간 독재하며 약 8년 동안 독주한 독재 정치를 막기 위해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전국의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시위는 경적을 울리는 차들과 넥타이 부대들의 위로 휴지와 흰 손수건이 흩날렸다. 보태진 마음들을 거름으로 계층을 넘어 일어난 연대는 사회적 변화를 야기했다.
사람들은 경찰의 방패에 꽃을 꽂았고 여름을 맞은 카네이션은 방패의 한 가운데에 그렇게 뿌리내리듯 심어졌다. 1987년 6월의 그 시간들은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가 사람들에게 새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기까지.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었다.
여름이 세상을 잊게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기억해낸다. 성별과 나이, 지역과 빈부격차를 떠난 소란은 절대 깨지지 않을 것만 같던 벽을 부쉈다.
그때 사람들은 방패에 꽃을 꽂았고 지금 여기, 이곳의 사람들은 촛불을 든다.
촛불 같은 파도가 반짝거리며 윤슬을 내비칠 때, 거기 뿌려졌을 넋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언제나 ‘되살아오는 유월에*’.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유월의 노래’ 가사 중
봄이 왔다. 눈이 녹은 곳에 새살처럼 잎이 나고, 세상은 빈틈없이 환해졌다. 누추한 구석도 새잎 가득한 꽃대궐.- 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