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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도형은 사각형이다. 사각형은 네 변의 길이가 정해졌어도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고 변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모양은 무한하게 바뀐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도형은 삼각형이다. 세 변의 길이가 결정되면 한 가지 모양으로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삼각형에는 변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도형은 나선이다. 귓속의 달팽이관, DNA의 분자 구조, 바다의 소용돌이, 목성의 폭풍, 은하의 소용돌이…… 기이하고 거대한 형상의 모습이었다가도 일순 모습을 바꾸는 나선은 가장 숭고한 도형이다.
여기, 언젠가 사각형이든 삼각형이든 잠깐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흐릿한 나선인 채로 살아가던. 그 와중에 맞은편의 점 하나가 불현듯 떠나버려 덜렁, 꼭짓점이 된 ‘아란’이 있다. 세상은 너무 완벽해서, 떨어져 나온 꼭짓점을 받아줄 품이 없다. 떠나버린 엄마와 ‘또 와 아저씨’의 파산 선고에 점 같은 짐짝이 된 아란은 세상 바깥의 가장자리로 내몰린다.
내몰리기 전, 아란이 나선이었을 때. 맞은편에는 ‘엄마’가 있었다. 시장의 조악한 짝퉁들을 구경하고 매운 잡채나 함께 먹던. 굳이 휴대폰을 놔두고 생활정보 신문에 일일이 빨갛게 동그라미를 치던. 어쨌든 아란은 그런 엄마를 의지하며 살았고 그래서 ‘당분간만 너는 나대로 나는 나대로 살자’는 엄마의 약속은 몸은 다 컸지만 열아홉 인 아란을 ‘나 정말 다 컸다, 내가 아르바이트할게.’라고 다짐하게 하던 것이었다.
아란의 부탁에도 엄마는 떠나고 곧 아란도 떠난다. 채권을 담보로 엄마가 아란을 맡겼던 ‘또 와 아저씨’가족은 식은 치킨을 앞에 두고 내린 파산 선고를 끝으로 단숨에 흩어진다. 아란은 계속해서 홍시 생각을 한다. 무슨 영양제도 아닌데 족족 엄마 입으로 들어가던 벌겋게 익은 홍시를. 찜질방에서 자다가도 단칸방을 구두계약하다가도 치킨집에서 배달 갈 코카콜라를 챙기던 와중에도 불쑥 떠오르는 홍시와 엄마 생각은 처치 곤란한 ‘한숨 덩어리(본문 93페이지)’같다.
복수하듯 아란은 엄마에게 백통이 넘는 문자를 보낸다. 저주를 퍼붓다 일기를 쓰다 이내 23번 버스의 종점에 내가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건 미약하지만 선명한 구조 신호 같아서 아란은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휴대폰을 든다. 문자를 읽든 읽지 않았든 어디론가 닿을 문자는 가볍게 수신인을 찾아간다.
군산은 바닷가 근처라 그 문자가 알아서 막힘없이 잘 가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든다. 아란이 살고 있는 곳은 군산이다.
공장이 허물어진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남은’사람들이다. 죽음으로부터 남겨진, 있든 없든 개의치 않는 나머지,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에서 뜨거운 기름에 닭은 튀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따금 가게 문을 매몰차게 닫고 떠나야 할 정도로 찌든 내에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콩나물 많이 넣은 아귀찜’을 해준다는. 그렇게 남도 가족도 아닌 사람의 손을 잡고 이끄는.
아란은 여전히 엄마에게 저주를 퍼붓다가도 홍시를 사서 머리맡에 둔다. 달고 붉은 홍시가 물러터질 때까지. 그렇게 백 개, 이백 개 쌓일 때까지. 그걸 쳐다보다 나간 가게에 매일 같이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군산에서 대천 바다까지는 많이 멀지 않다. 오늘 같이 가자(본문 210페이지)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간다. 그게 복수의 전부여도 괜찮을 것이다.
* '나선'에 대한 언급 부분은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도형, 나선> 도서를 참고하였음
"이제 시작인데 여행지에서 막 돌아온 기분이야. 십분만 누워 있다가 출발해야지. 오늘 같이 갈 거지?"-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