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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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오래 깊이 잠겨 있고 어쩌다 마주칠 때면 기다렸다는 듯 지금을 덮친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억은 수영장 같다고 말하게 된다. 언뜻 만만해 보이지만 몸을 담그게 되면 한순간 발이 닿지 않는 수면 위를 대책 없이 부유하게 되는 것.
그리고 조금 더 깊이 잠수하게 되면 하수구가 보인다. 찌꺼기 같은 기억들이 모여 있는 곳에 발을 디디면 우리는 잊었던, 잊고 싶었던 그래서 기억하지 않았던 과거로 빨려 들어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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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눈치가 없다는 말은 편견이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서 다 커버린 어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거나. 어른들이 아이들은 ‘눈치가 없다’는 말로 치부해버리는 순간 아이들은 거대한 무력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고 누구도 지킬 수 없다는 걸 느끼며 아이들은 자란다. 그런 아이의 깊숙한 기억으로부터 어떻게 외로움이 사무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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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민선은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시절을 보낸 9살 아이다. 수영을 좋아하진 않지만 선수급인 언니를 따라 수영장을 학원처럼 다니고 있다. 담임 선생님은 부모로부터 촌지를 받은 아이인 희영을 특별히 예뻐하고 아이들에게 ‘지랄’ ‘찌질이’라는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런 데에 눈치가 빤해서, 담임이 희영을 예뻐할수록 희영의 추종자는 늘어난다. 모두가 죽어야만 끝나는 피구 게임에서 희영은 늘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그 미묘한 권력관계가 두드러지는 것은 민선의 집에 놀러 오게 된 희영이 아이들에게 ‘병원놀이’를 제안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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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주사를 맞으라는 희영의 말에 바지를 내린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차례대로. 그건 분명 이상하고 불편한 일이었지만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척 바지를 내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느끼는 불쾌함은 숨길 수 없는 표정에서부터 기어 나오지만 희영을 비껴가고 비껴간 이상함은 아이들이 함께 있는 그 공간 전체에 어물쩍거리며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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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상함을 느껴본 적 없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는 거대한 관계의 장이고 아이들의 마음은 그 안에서 너무나 쉽게 뒤섞인다. 그래서 내 마음과 네 마음을 구분하기 어렵다. 때로 선택권조차 없다. 그리고 아이들은 거기서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기억하는 건 그렇게 남겨두고 싶은 우리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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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은 부동산 투자로 집안을 이끌어가는 엄마의 둘째 딸로, 자신의 존재를 달갑지 않아 하는 언니의 동생으로, 희영의 추종자로, 인경의 주인님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나날 가운데, 어떤 아이의 불행은 ‘요즘 세상이 무섭잖아요’라는 어른의 말로 퉁쳐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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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모든 게 민선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다 버렸던 어른들의 구두와 같아 보이는 그것을 제 발에 끼워 넣는 민선이 못돼서. 그런 일들을 벌이거나 그런 일에 뒤섞인 거라고 말하기에 민선이는 너무나 평범한 보통의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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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서운 세상으로부터 불행을 겪은 아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만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나는 그런 생각을 잘도 잊는다. 내가 잊은 기억은 점점 젖어들며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 기억은 수영장 같다고 말하게 된다. 언뜻 만만해 보이지만 몸을 담그게 되면 한순간 발이 닿지 않는 수면 위를 대책 없이 부유하게 되는 것.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는 하수구에 닿은 기억은 언제나 그곳에서 물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다. 언제라도 가볍게 올라와 우리를 수영장 깊은 곳에 빠뜨릴 수 있다는 듯. 여유롭게 출렁이며.
나는 아이들이 왜 피구를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 다 죽거나 다 죽여야만 끝나는데…- 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