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비밀과 비밀이 아닌 것
잠들 때마다 꿈을 꾼다. 방충망을 찢고 창살 틈으로 기어 들어가 거기서 추락하는 방법으로 도망치려는 꿈. 누군가 내 방 창문 밖으로 지나가다 돌아와 내 이름을 부르는 꿈. 무섭고 시시한 악몽들이다.
그래서 ‘꿈의 해석’을 찾았다. 한 학문에 획을 그은 저명한 사람이 비춘 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간결하고 명징한 학문 앞에서는 모든 게 아무것도 상관 없어질 것 같았다. 방 안에 도사렸던 낮이 물러갈 때까지 책을 읽었다. 딱 그 속도만큼 천천히. 냉정해질 수 있었다. 그가 나를 혐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공중을 떠돌던 공황이 가라앉은 그날 밤이다.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혐오는 차별이라고 배웠다. 세상에 달고 나온 몸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나이 듦이 그렇다. 그는 원초적인 나의 몸이 ‘더럽다’고 말했다. 말했었다. 그러니까 그의 이론을 빌리자면 그는 그가 더 이상 세상의 비밀이 아니게 된 나의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를 전부 부정한 것이다. 그가 밝혀냈던 비밀을 꺼버리는 방식으로.
내가 그의 무덤에 찻잔을 올렸을 때, 거기 있던 건 무덤도 그도 아니었다.
그건 무엇이었나.
누군가를 찾고 동시에 버려졌던 일이 적지 않지만. 이렇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할 때마다 도리어 침착해진다. 그리고 칼을 갈게 된다. 무뎌지지 않은 칼로 누구든 찌를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해야 누군가 '우리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게 나를 슬프고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고 불미한 여성으로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을 안다. 나는 느낀다. 그들의 시선이 두려운 건 아니다. 아니다, 사실 두렵다. 그 시선에 내가 나를 잊거나 잃을까 두렵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싫다.
누구에게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이 있다. 비밀들은 전부 어디로 갈까. 우리가 비밀을 잃어버리는 걸까 비밀이 우리를 잃어버리는 걸까. 사실은 싫다고 말하고 싶지만 괜찮다는 말로 대신했던 사실은 어째서 비밀이 되어 버렸을까. ‘싫어요’라는 단어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우리는 어디로 걸어왔을까.
나는 제야의 2008년 7월 14일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을까. “끔찍한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부터? 백일장에서 만난 수지에게 제야가 “은비도 잘 있어?”라고 물었을 때부터? 내겐 아무 잘못이 없다.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을 제야가 두 번 반복했을 때부터? 제야가 부딪힌 남자 어른의 손과 바지에, 제야의 옷에 아이스크림을 묻혔을 때부터?
나는 어떻게 제야에게 일어날 일을 짐작할 수 있었나. 그 애가 컨테이너 박스에 혼자 갔을 때부터였나. 비가 그 애를 그 안으로 피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던 때였나. 그 안에서 잠깐 담배를 피우던 그 애가 있는 곳으로 그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몸을 움츠렸다. 그 애가 당장 뛰쳐나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려가길 바랐다. 세상을 살면서 배운 온몸의 감각이 저 애는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애가 겪을 세상의 시선과 말에 대해서도 나는 알았다. 악몽 같은 공포였다.
그간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꺼려 하고 혐오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변두리로, 변두리의 바깥으로 쫓아냈다.
그렇다면 이들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 있을까.
이 질문을 소설을 쓰는 내내 생각했다고 작가는 말했다.
제야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내 자리는 어디 있지? 제야에게는 분명히 자리가 있었다. ‘하루하루를 꼭꼭 눌러서 살 수 있는 만큼 다 살아내고 싶’은. 돌아갈, 돌아갈 수 있는. 그건 정말이지 당연한 거여서 없어져 버려서는 안됐다. 언제든 어느 때든 제야의 자리가 있어야 했다.
제야의 자리를 없앤 건 무수한 어른들이었다. 뺏거나, 더럽히는 것을 떠나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그들은 제야를 지우고자 했다. 그들에게 제야는 ‘한 달에 거둬들이는 돈이 얼만데 젊어서 여자애 하나 건드린 게 무슨 대수’가 되는 아들의, 남성의 비밀조차 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사장이 그런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이 문제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 문제’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제야를 위한다며 이런 말을 했다. 여자애가 아직 어려서 뭔가 착각을 한 거 아니야? 나이 많은 여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말 그런 일을 겪었다 쳐도, 그래도 너는 잘못이 있다.
제야는 혼자 울고, 남들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잘못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했어요.
그 말을 그들이 믿거나 듣지 않아도 제야는 힘을 주어 말해왔다. 조각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손도끼를 갖고 나오긴 했’어도, 그걸 방파제에 두고 오는 방식으로 제야는 살아나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서, 나가며, 제야는 제니를 만나러 갈 것이다. 소원을 빌고 촛불을 껐던 자정을 떠올리며.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를 기다렸어, 라고 쑥스럽게 말해주며. 사랑해, 제니야. 편지를 쓰듯 꾹 꾹 눌러가며. 마음을 다해.
p.s 정확해지기 힘든 소설이었다. 자꾸만 추상 속으로 숨어 들것 같아서 커피 대신 물을 마시며 적었다. 몸으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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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으면 불을 켜도 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같이 쫄면을 먹으러 가자고 청해줘서 고마워.
가만히 방문을 닫아줘서 고마워. 나를 옷장에서 끄집어내지 않아준 것도.
네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매번 내게 달려와줘서 고마워.
어두운 밤 같이 나가주고,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손에 들고 있어줘서 고마워.
내가 시비를 걸 때조차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어렸을 때부터 네가 부러웠어. 너를 생각하면 용기가 났어. 너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은 단 한번도 없어.-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