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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랑팔랑 거리는 보라
  • 반박하는 여자들
  • 대니엘 래저린
  • 14,220원 (10%790)
  • 2019-09-06
  • : 35

반박하는 여자들

 

말하는 남자들

 

공학(共學)을 다녀본 여성들이라면 알 것이다. 어리고 말이 많은 남성들이 얼마나 무례하고 폭력적인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서 대학교에서 와서도 이 진술은 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분노에 떨며 온몸으로 반박했던 순간이, 불쾌감이 그대로 드러나던 표정이, 차라리 못 알아들은 척 말을 돌리던 치욕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일상에서, 의견을 주장하고 말을 하는 사람들은 남성들이고 거기 반박하거나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그건 논점에서 어긋나는 이야기다) 남성들은 대체로 자신의 의견을 스스로 비판하지 못하고 여성들은 자신의 의견을 너무나 많이 검열한다. 이 사실이 극명히 드러나는 차이점은 ‘사과’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돌에게 ‘못 먹는 감’이라고 칭하고 타인에게 ‘너 페미니스트니?’라고 물었던, 지속적으로 혐오적 콘텐츠를 재생산 해내는 래퍼와 가수, 유튜버들. 이 중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반면 여자 아이돌은 <82년생 김지영>을 읽어 논란이 되었고 애교 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청자와 미디어의 질타와 조롱을 당했으며 더 이상 소속사와 사회의 요구에 맞춰 ‘짧은 치마’를 입지 않는 그들에게 남성들은 ‘페미 코인’을 탄 거냐며 삿대질을 해대고 있다. 그들은 응당 받아야 하는 징벌인양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고 대중에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더 이상 그 이슈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과해야 했다.

그가 어떻게 그 책을 읽게 됐는지 그 책이 정말로 ‘그런’ 책인지. 그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애교를 강요당했는지 그런 사회에서 살아온 그가 최근 어떤 일을 겪어야만 했는지. 그가 남성들로부터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그들은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 불만을 가진 주제에 ‘권력’을 쥐여준 ‘예쁨’마저 거부하려 드는 이상한 존재. 즉, 마녀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 필요한 것은 솔직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솔직함의 조건은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욕망을 자기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의 욕망은 한 눈에 달콤하고 짜릿하다. 말 한마디와 행동 한 번에 지금 당장 해소되며 굳이 어렵게 찾지 않아도 네이버 연관검색어에 전시되어 있다.

반면 여성들은 욕망을 드러내면 이분되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돈을 좋아하면 된장녀고(김치녀는 훨씬 더 포괄적인 혐오 개념을 내포한다) 돈을 아끼면 간장녀가 된다. 남성을 구원하면 성녀가 되고 남성에게 애원하면 창녀가 된다. 운전에 서투르면 김여사가 되고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하면 맘충이 된다. 그간 많은 지식인들이 지적해왔지만, 이러한 무수한 대명사 속에 여성은 없다.

<반박하는 여자들>의 여성들은 오해하고 이혼하며 사랑하고 정사한다. 이게 내 욕망이고 나는 한순간 우리 관계를 전복 시킬 만큼 큰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또 한 편으로 그들은 망설이고 선택하고 후회한다. 결코 타자화되지 않는다. 솔직하게, 나는 어리석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스펙터클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가 말하는 정상성의 범주에는 이미 한참 벗어나 있다. 도리어 이혼녀, 꽃뱀, 창녀라고 함부로 칭해지던 역할을 맡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여기 있다. 그들은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맞으면 뭐 어쩔 건데.”

16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단편은 <거미 다리>와 <반박>이다.

<거미 다리>의 나는 거짓말을 한다. 내용은 주로 아빠나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내용이고 또 스스로 정말로 그렇다고 믿음으로써 안전해지고픈 절실함에 대한 것이다.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아빠를 안심시키려고 하지만 아빠는 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다만 당부한다. “착하게 지내다 오렴.” 아빠의 낭패감과 죄책감에는 진짜 ‘내’가 없다. 새 가족을 꾸려 가지게 된 딸의 이름을 ‘호프(Hope)’라고 지을 만큼의 되직한 자기 연민에 있을 뿐이다.

엄마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엄마는 내가 엄마와의 유일한 관계성이라고 믿는 유년 시절에 살았던 아파트를 이미 청산한 상태다. 엄마는 내가 어디에서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물론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 이사는 모두에게 좋다는 걸 나에게 설명하려고 들지만 그건 나에게 있어 알아들을 수 없는(듣고 싶지 않은) 외국어와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이복남매와 함께 산 ‘따뜻한 핑크색 스웨이드 구두’는 너무 예쁘지만 왠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한 갈래로 묶은 머리와 옅은 주근깨가 난 얼굴은 아이 같은데, 낮은 굽 위로 들려 올라가서 생겨난 종아리의 곡선은 어른인 여자’로 비치는 거울 속 모습은 그가 끊임없이 욕망했던 가족애처럼 이질적이다.

나는 그 구두를 신고 이복남매와 함께 정신이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신다. 그리고 게임을 한다. 부모가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던 시절 남매가 가출하여 ‘고아 마냥’ 저지르고 다녔던 수준의 게임이다. 택시를 탄 세 사람 중 ‘질(이복 남매 중 한 명)’이 기사에게 가짜 주소를 말하고 기사가 길을 찾는 사이 세 사람은 택시에서 내려 세 방향으로 갈라진 후 쿵쿵 뛰어간다. 택시가 쫓아오는 건 나다.

하지만 나는 택시가 건널 수 없는 다리를 찾을 수도, 형제들이 찾으러 와줄만한 어두운 장소를 찾을 수도 없다. 아름다운 새 구두는 내가 모퉁이를 도는 찰나에 부러지고 나는 무력하게 주저앉는다. 나는 엄마에게 받았던 돈의 전부를 택시 기사에게 건네며 기사의 가래를 얼굴로 받아낸다. 기사가 떠나고 나를 찾아 위로하는 남매를 밀쳐내고 싶지만 그는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을 밀쳐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모두와 헤어진 후 찾아온 성당에서 나는 ‘우리가 가족을 이루려던 노력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임을 담담히 깨닫는다.

이렇듯 내가 겪어내는 모든 상황은 타의적으로 이뤄지지만, 그것 역시 나의 자의적인 선택이다. 나는 내가 끊임없이 집착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상황에서도 여전히 ‘퍼즐 조각’이다. 결국 부정하고 싶어 했던 것들을 인정하며 자신을 위한 자리를 내주는 여자의 친절을 거절하지 않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독립적이되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게 한다.

<반박>은 세 면의 페이지에 불과한 아주 짧은 단편이다. 파티에서, 남자 친구의 친구는 ‘너(본 단편은 화자를 너라고 칭한다)’에게 “네가 너라서 참 유감이네.” “네가 그 녀석 차지라서 참 유감이야.” “제기랄, 그것만 아니었으면 난 너한테 온갖 짓을 다 할 텐데.”라고 성희롱 한다. 하지만 ‘너’는 위축되는 대신 그를 호젓한 계단으로 이끈다. ‘너’의 몸짓 몇 번에 그가 사정하는 장면은 되려 그를 우습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너’는 남자친구와 사람들에게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반박’한다. 반박이 어떻게 저항이 될 수 있는지 나지막이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소문의 여성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 다 진짜가 될 수 있는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는다.

여성에게는 이미 너무 많은 대명사가 붙여져 있다. 옮긴이의 말처럼, ‘그들의 삶과 존재는 어떻게든 그 범주를 초과한다.’

끝으로, 물론 ‘그렇지 않은’ 남성들도 있다. 하지만 남성들은 ‘나는 그렇지 않다’며 고통에 대한 논의를 본인의 것으로 만드는 대신 피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여자아이에게는 달랐다-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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