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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신학학기’(구미정 저, 서로북스)를 읽고 
‘그-신’ 놀이터에서 놀자!
  • 잘 놀아야 한다.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 1896~1971)은 어린아이의 발달과정에서 ‘상상놀기’가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나 노래를 통해, 또는 친구들과 소꿉장난, 인형 놀이 등을 하면서 아이들은 미지의 세상에 대해, 그리고 타인의 마음에 대해 지도를 그린다. 너그러움과 이타심을발휘하는 법도 배운다. 놀이는 이의 성장과 건강을 촉진하며, 집단관계 이끌어내고, 사회를 의해하며, 의사소통을 배우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잘 놀아야 한다. 비단 아이들만 그럴까? 아니다 어른도 놀이가 필요하다. 잘 놀 수 있는 놀이기구와 놀이터, 놀아줄 친구가 꼭 필요하다. 저자는 세상을 이해하고 잘 살아가기 위해 잘 놀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신’ 놀이터를 소개한다. ‘그-신’ 놀이터는 성서를 표현한 ‘그림’과 성서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이해하는 ‘신학’이란 놀이기구가 있는 장소이다. 
  •  저자는 그림과 신학이 있는 ‘그-신’ 놀이터에서 먼저 놀아본 경험(CBS TV 성서학당, 렘브란트 미술순례 강의)을 토대로 ‘어른이 되면서 점점 옅어진 예술적 감성을 일깨우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저술 목적을 밝힌다. 특히 일반인에게 성서의 문턱을 낮추자니 그림이 ‘신의 한수’였다고 한다. 이는 성화가 그려진 목적과도 부합된다. 성화란 성서를 읽을 수 없는 신자들을 위해 성서의 내용을 쉽게 전달할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한 친구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을 보여주었다. 당시 그림의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그 그림은 수많은 그림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탕자의 아버지의 오른손과 왼손의 모양이 달라. 거친 손은 하나님의 부성을, 부드러운 손은 하나님의 모성을 상징해. 탕자는 화가 자신을 상징해. 형의 눈빛을 봐봐.”라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는 달라졌다. 이후 ‘탕자의 귀환’은 내 삶속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나만의 그림이 되었다. 저자는 바로 그 친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내 안의 예술적 감성을 일깨워 그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세상을 읽는 신학적 안목을 키워준다. 저자는 ‘그-신’ 놀이터에서 잘 노는 방법을 알려주는 선생님, 안내자이다. 어떻게 잘 놀 수 있을까? 
  • 첫째, ‘그림’이라는 놀이기구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그림은 성서가 화가의 신학을 통해 표현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늘날 성서와 성화는 따로 논다. 성서는 활자화된 두꺼운 책 속에 갇히고, 성화는 교과서에 시험을 위해 암기해야 하는 과제처럼 여겨지며, 신학은 종교적 서사(書史)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한 채 생명력을 잃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관련 정보에 대한 접근성은 높아졌지만, 예술로 승화되어 제대로 놀지는 못하는 현실이다. 고로 유명 화가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라는 놀이기구와 이를 해석하는 신학이란 놀이기구를 분리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은 카리바조, 루벤스, 렘브란트, 미켈란젤로, 고흐, 고갱이 그린 다양한 성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같은 성서의 내용이 시대의 변화, 화가의 신학 및 경험에 따라 달리 표현되는 점을 비교하여 이해할 수 있는 점은 놀이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준다. 예를 들어 <마태와 천사>의 카리바조와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신학적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 카리바조의 그림에 천사는 마태의 머리 위에 있다. 이는 수직적인 종교적 권위, 교회의 권위를 상징한다. 반면 렘브란트는 천사가 마태의 뒤에서 속삭이듯 위치해 있으며, 마태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는 성서란 하늘의 언어를 기계적으로 받아쓴 산물이라기 보다는 기록자의 고민이 담긴 흔적이란 것을 표현하며. 중세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데카르트의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서해석의 변화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기도 했다. 샤갈과 미켈란젤로의 그림과 조각에서 모세의 머리 위에 뿔이 있다. 그런데 렘브란트의 모세 그림에는 뿔 대신 빛이 있다. 왜 그럴까? 이는 성서 번역의 차이 때문이다. ‘빛이 났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란’이다. 그런데 히에로니무스가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카란’을 ‘케란’으로 잘못 읽어 라틴어‘코르누타’라고 번역했다. 이 ‘코르누타’는 ‘뿔이 났다.’는 뜻이다. 그래서 종교개혁 전의 모세에게는 뿔이 있고, 종교개혁 이후의 모세에게는 빛이 있다. 남성과 여성의 시선에 따라 그림이 다르게 표현이 되기도 한다. ‘롯과 딸들’이란 성서 이야기를 표현한 그림에서 남성들의 그림에서 딸들은 옷을 벗은 채로 음탕함이 표현되지만, 여성화가 젠텔레스키는 등장인물들이 옷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절제미를 보이며 성서의 내용을 표현한다. 이처럼 저자는 그림이라는 놀이기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둘째, 신학이란 놀이기구를 알아야 한다. 신학은 사전적으로 ‘하나님 그 자체를 정경이나 이성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연구하거나 신과 관련된 교리와 방법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주가 만든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며, 인간은 어떠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고로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저자는 신학에서 다루는 ‘성서, 천지창조, 나그네, 도시, 언약, 믿음, 아름다움, 가난, 감정, 헛됨, 공동체, 죽음’이란 주제를 그림과 성서해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각 주제가 나와 관련이 없는 먼 이야기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여성의 세 시기’라는 그림은 아이, 소녀, 노파를 소개하며,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고,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으로 저항하는 이는 노파뿐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죽음에 대한 바른 생각의 중요성을 밝히며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해야 ‘아모르 파티’(네 삶을 사랑하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갈릴리 폭풍 가운데 있는 예수와 제자들을 그린 렘브란트 그림과 성서본문을 읽어내며 성공에 딴 눈을 파느라 생명을 잃어버리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더불어 토비트와 안나라는 그림과 외경본문을 해석하며 신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공감이 없으면 맹목적이며 광신이라고 주장하며 오늘날 신앙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한다. 
  • 셋째, 함께 놀 친구를 만나야 한다. 먼 거리를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한다. 물리적 시간과 정서적 시간의 차이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이다. 마찬가지로 놀이터에서 잘 놀 수 있으려면 좋은 친구가 있어야 한다. 저자를 통해 좋은 두 친구를 만났다. 바로 붓을 든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렘브란트와 고흐이다. 렘브란트는 가톨릭교인이었다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일원이 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고흐는 시골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전도사가 되어 사역하다가 설교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나 화가가 되었다. 이 둘은 성서를 바르고 깊이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렘브란트는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성서를 이해하는 신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특히 같은 주제의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던 그의 특징을 통해 삶의 경험이 신학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게 된다. 자화상을 자주 그리던 렘브란
    트는 명망을 얻던 화가에서 추락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은 후 자신을 탕자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자화상과 [탕자의 귀환]으로 인생을 공부하게 된다. 다음으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삶의 의미를 관찰하려고 노력했던 고흐와 친해지게 되었다. [감자먹는 사람들]이란 그림에서 가난한 밥상일지라도, 정직한 손노동을 통해 얻은 일용할 양식은 성만찬과 다르지 않다고 해석하고, 자신의 동거녀 시앵을 그린 [슬픔]에서 ‘몸을 파는 여인’이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구호실에서 성장해 몸을 팔아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던’이면에 숨겨진 슬픔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울림을 준다. 고흐는 그의 믿음을 삶으로 번역하며, 붓을 들어 표현한 신학자이다.  
  • 잘 놀아야 잘 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신’놀이터는 참 좋은 장소이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놀이터에서 ‘그림’과 ‘신학’이란 놀이기구와 화가라는 친구들과 놀다보면 서양 종교화를 읽는 안목을 키울 뿐만 아니라, 신학의 주제 언어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며, ‘그 신’(The God) 즉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알아가게 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나는 아몬드나무에게 말했노라. 아몬드나무야, 나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그러자 아몬드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 ‘그-신’놀이터에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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