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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급 비평가 6인이 쓴 매혹의 인문학 사전](고모리 요이치 외, 1991, 송태욱 옮김, 앨피, 2009), 16-23쪽.

제0부, 텍스트                 -고모리 요이치  

 

 '작품'과 '텍스트'를 날카롭게 대립시킨 사람은 롤랑 바르트이다. 바르트는 언어로 만들어진 예술을 '작품'으로 파악하는 사고에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성립시키는 사적 소유라는 개념이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다고 지적했다. 개성과 독창성을 지닌, 작자가 단 하나의 의미(예컨대 주제로 추출된 서사 내용의 요약이 그대로 그 작자의 사상을 표출하는 형태)밖에 갖지 않는 것으로 개인의 성향이나 심리에 기초해 쓰고 완성시킨 언어의 집적을 그 후에도 개인적으로 소유할 권리를 갖는다(저작권 등)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을 읽을 때 독자에게 허용되는 자주적 선택의 여지는 그 '작품'을 거부할 자유, 즉 읽지 않을 자유뿐이다. 독자의 역할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우리는 단지 작자가 설정한 최종적이고 유일한 의미를 찾아내는 수동적 객체가 되고 만다. 

  '작품' 개념 안에서는 작자라는 개인, 곧 인격적 통일체로서 창조 주체가 그 틀을 만들고, 독자는 단지 그 작품이 말하고자 한 것과 주장하고자 한 것을 향수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작자'만이 생산자이며 독자는 소비자일 뿐이다. '작품'에서는 생산자인 작자가 기호 표현을 통해 전하려는 기호 내용이 중요하며, 단하나의 기호 내용만이 기호 표현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작품'에 비해 '텍스트'는 우선 복수성의 장이다. '텍스트'의 원래 뜻은 '직물'이다. 한 필의 천이 씨실과 날실의 교착으로 짜이듯, '텍스트'는 다양한 요소의 착종체로 나타난다. '텍스트'는 선행 텍스트와 동시대의 여러 텍스트를 인용한 직물이고, 계열체(패러다임paradigm)와 통합체(신태그마syntagm)*의 교착이다. 그리고 여러 코드가 상호 변환하는 장이자 다른 언어가 대화하는 장이며, 무엇보다 그 자신이 여러 텍스트의 착종체인 독자가 관련됨으로써 의미가 생산되는 동적인 장이다. 

  '텍스트'를 읽는 독자는 쓰는 것과 읽는 것의 상호 관계를 의식하고, 공동 집필자처럼 '텍스트'의 의미 생성에 스스로 참가하여 생산 행위를 하는 주체가 된다. 그 안에서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은 결코 안정된 양면체로서 관계를 맺지 않는다. 독자가 기호 표현에 새로운 관계를 부여함으로써,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된 기호 내용하고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수적인 기호 내용이 산출된다. '텍스트'는 작자가 만들어낸 일의적으로 구축된 세계가 아니라, 독자가 읽음으로써 기호 체계 자체의 전도와 재생, 곧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의 새로운 결합 관계가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의미가 생성되는 계속해서 유동하는 세계인 것이다.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작품'이 물질의 조각이자 도서관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책이라면, '텍스트'는 방법론적인 장이며 언어 활동 중에만 존재한다. 

  바르트의 이 생각을 러시아 형식주의, 특히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 이론과 결부시켜 '텍스트론'으로 이끈 사람이 쥘리아 크리스테바이다. 크리스테바는 바흐친의 이론에서 "문학 언어mot는 하나의 점(고정된 의미)이 아니라 여러 텍스트 표면의 교착, 여러 문장(에크리튀르), 즉 작가나 청자(등장인물), 당시 또는 선생하는 문화의 콘텍스트가 섞이는 대화가 된다"는 것을 읽어 냈다. 크리스테바는 이로부터 의미 생성이 이루어지는 텍스트 공간의 세 가지 층위를 추출하고 다음과 같은 모델을 제시했다.  

       그 세 가지 층위란 쓰는 주체, 외부 텍스트(대화의 세 요소)이다. 따라서 언어의 존재 방식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a)수평적으로 보면 텍스트의 언어는 쓰는 주체와 청자 양쪽에 속해 있다. (b)수직적으로 보면 텍스트의 언어는 그것에 앞서거나 같은 시점의 문학 자료 전체를 향하고 있다. (중략) 바흐친은 그 두 개의 축을 각각 대화 및 대립하는 것의 병존ambivalence(=양가성)이라고 하지만, 명확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엄밀함의 결여는 오히려 바흐친이 문학 이론에 처음 도입한 발견을 보여준다. 즉, 어떤 텍스트도 다양한 인용의 모자이크로 형성되며, 모든 텍스트는 또 다른 텍스트의 흡수와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호주관성이라는 사고 대신 상호텍스트성interextuality(=텍스트 관련)이라는 사고가 정착한 것이다.  - [언어, 대화, 소설](1966) 중에서. 크리크테바의 [세미오티케:기호분석론](1969)에 수록**  

  텍스트의 세 층위는 어떻게 교착하고 있는가. 예컨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쓰는 사람'은 선행하는 텍스트나 동시대 텍스트의 '수용자'이고, '쓰는 사람'이 언어로 뭔가를 쓴다는 것(에크리튀르)은 선행하는 혹은 동시대 문학 자료를 독해하는 것이자 다른 텍스트를 자신의 텍스트에 흡수하고 변형시켜 가는 과정이며, 자신의 텍스트를 통해 다른 여러 텍스트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행위의 실천 과정은 '수용자', 즉 독자의 행위와 거의 같다. 읽는다는 것은 독자가 다양한 장르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지금 읽고 있는 텍스트를 상호 관련시키는 일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톡자 자신의 텍스트를 짜 나가는 것이다. 

  아울러 "대화 및 대립하는 것의 병존"이라 함은, 문학 텍스트 속에 역사나 사회를 둘러싼 다양한 정보가 삽입되어 있는 것과 동시에, 텍스트 스스로 역사나 사회 속으로 삽입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문학 텍스트의 언어는 역사나 사회를 둘러싼 여러 텍스트와의 다양한 응답성, 대화성 속으로 열려 나간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분명 언어 체계와 언어 배후에 있다고 믿어졌던 실체론적 관념이나 실체로서의 지시 대상 세계를 분리했지만, 기호 체계로서의 언어에서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의 결합은, 소쉬르의 이론을 매개로 한 구조주의나 기호학에서도 일대일 대응 그대로였다. 

  크리스테바는 소쉬르의 패러그램paragram*** 연구와 바흐친의 이론을 결합함으로써 문학 텍스트가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의 일대일 대응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밝혔다. 즉, 정의하거나 규정하거나 등호로 연결할 수 있는 <0-1>시스템이 아니라, 기호이자 기호가 아닌 것, 단선인 동시에 복선, 선상인 동시에 면상, 불가역이면서 동시에 가역인 양면성을 지니는<0-2> 시스템으로 언어가 문학 텍스트에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 관계를 둘러싼 이론은 '현상텍스트=페노텍스트'와 '생성텍스트=제노텍스트'의 구별로 나아간다. 텍스트는 단순한 언어 표현이 아니며 구조화된 의미 작용도 아니다. 텍스트는 의미 작용의 산출 과정이며 생성 과정이다. 그러나 이 산출은 언어 '현상'으로서 실제 인쇄되어 있는 현상텍스트에 기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읽으려면 현상텍스트에 나타나 있는 언어의 범주가 의미를 산출할 수 있다는 전제를 지탱하는, 아직 기호로 코드화되어 있지 않은 무한의 차이화, 전환,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인 생성텍스트****로 수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생성텍스트는 표면=그림인 현상텍스트의 바탕이며, 의미되는 구조에 대해 의미를 낳는 생산성이다. 종래의 구조주의나 기호학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이 구체적인 언표 구조 안에 나타나는 언어 현상으로서의 현상텍스트였다면,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기호 분석'은 결코 구조나 구조를 형성하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무한한 기호 표현의 차이적 연쇄 과정인 생성텍스트로 계속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성텍스트는 어떤 존재로 있는 것도 아니로 실체로서 마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계속 다가간다고 해도 우리가 실천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생성텍스트의 무한을 유한한 것으로 나타나게 하여 그것을 일정한 언어 코드로 들어맞게 한 현상텍스트뿐이다. 따라서 '기호 분석'의 실천은 기호론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언어로 언어 자체를 계속해서 비판하는 것이다.  

  이 비판의 요점은 '부정'이라는 전략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기호와 기호가 서로 지우는, 시니피앙의 충돌로서 행해지는'부정은' <0-1> 시스템의 '......가 아니다'라는 비판에 부속된 부정(어떤 판단을 부정하려면 먼저 그 판단을 보여 주어야 한다.) 또는 변증법의 지양*****처럼 판단을 구성하는 부정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부정이다. 종래의 부정이 언어의 틀 안에서의 부정이라면 전략으로서의 '부정'은 언어의 틀, 기호를 성립시키는 약속 자체를 되묻는 조작이다. 

  크리스테바는 스테판 말라르메를 인용하며 시적 기능의 중요성은 "부정성의 운동으로서 파롤을 부정하고 동시에 이 부정에서 생기는 것조차 부정하는 점에 있다"고 했다. 언어만으로 구축된 문학 표현을 텍스트로 파악하는 입장은, 언어에 지나지 않는 것을 손쉽게 실체화하는 발상에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는 운동인 것이다.  

*패러다임과 신태그마는 언어의 여러 요소가 결합하는 두 가지 국면을 가리키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개념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의 기본 특성은 시간적인 선조성에 있으면, 언어의 선조적 결합이 신태그마이다. 언어는 배열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패러다임이란 신태그마로 만들어진 의미 작용 바깥에서 각 언어 요소와 관련된 다른 요소 집단을 말한다. 어떤 말이나 의미가 선택되면 당연히 패러다임 관계에 있는 다른 말이나 의미는 부정된다. 선택된 것과 버려진 것의 긴장 관계가 언어의 의미 작용에 내재하는 것이다. 로만 야콥슨은 패러다임을 은유(수직적)의 기능, 신태그마를 환유(수평적)의 기능으로 파악하고 이 개념을 언어 이외의 여러 기호에 적응하는 길을 열었다. 

** 바흐친의 대화 이론을 기초로 크리스테바는 '텍스트'라는 개념을 모든 대화의 이중성이라는 역동성 속에 펼쳐놓았다. 주목할 것은 바흐친이 말하는 '언어 활동이 갖는 이중성'과 에밀 방브니스트의 '디스쿠르dicourse'를 크리스테바가 통일한 일이다. 방브니스트는 디스쿠르 속에서 언표 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가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지만, 그 관계를 대화하고 생각하면 말하는 모든 행위가 모든 국면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중 구조를 포함하고 있음이 보인다. "대화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회로 밖에 두는 것"이라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텍스트는 둘 이상의 체계가 접합한 것이자 투쟁하는 것이다.   

***패러그램이란 일련의 단어 아래 숨어 있는 다른 위상의 단어가 통상적인 분절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단선적인 동시에 복선적인 연결, 선상 연결과 면 연결을 병행하여 갖는 언어의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 한 단어나 여러 단어의 문자 배열을 바꿔 전혀 다른 한 단어나 여러 단어를 구성하는 언어유희인 '애너그램anagram(단어를 바꾸거나 문장을 바꾸어 재미를 주는 놀이) 연구에서 나온 것이다.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생성텍스트(제노텍스트)는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안으로 환원되지 않는 의미 기능 작용을 말한다. 또한 생성텍스는 '무한의 복수성'이며 주체 바깥에 있고 시간 바깥에 놓인 '장'이므로 주체 바로 앞에서와 같이 저편에서 작용한다고 한다. 이 생성텍스트 개념은 관점을 살짝 바꾸면 인도 대승불교의 한 학파인 유식학파에서 말하는 '아라야식(창고가 되는 식)'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표상을 쌓아두는 장소'이며, 그것이 무의식의 영역이 된다는 것도 일치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변증법은 대화술을 의미했다. 헤겔은 개념이 모순을 포함한 것으로서 자기를 부정하고(테제와 안티테제), 그러한 부정을 부정(진테제)함으로써 본래의 자기를 실현해 가는 부정적인 매개 운동을 '지양'이라고 했다.그러나 헤겔의 부정적인 매개는 차이나 비동일성을 자기동일적인 하나의 전체로 회수햐 가는 목적론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아도르노는 비동일성을 강조한 '부정변증법'을, 바타유는 절대적 부정성에 기초한 "'바깥'의 사유"를, 메를로 퐁티는 우연성과 미완결성에 입각한 '초변증법'을 주장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크리스테바의 '부정'은 나가르주나(용수보살)의 [중론]에 나타나는 '공'사상에 가까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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