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 2007, 121분
-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 사랑도 변해.
<봄날은 간다>는 <미술관 옆 동물원>, <번지점프를 하다>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한국영화 베스트 리스트에 오르는 몇 안되는 러브스토리(사랑을 주제로 했다는 넓은 의미에서)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통곡하며 뒤를 따르거나, <사랑과 영혼>에서처럼 귀신과도 기꺼이 사랑하는 변치않는 러브스토리가 진실한 사랑이라고 당연스레 주장하는 식상한 영화와는 달리 <봄날은 간다>는 사랑도 변한다는 냉정하리만큼 현실적인 주제를 담고 있지만 너무도 수수하고 애잔해서 인간세를 통달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영화였다. 허진호는 멜로영화 전문(?!) 감독이지만 그의 영화를 두고 마냥 멜로영화라 부르기엔 어딘가 무례한 감이 있다.
<봄날은 간다>(2001)를 본지가 벌써 17년이 지났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백혈병에 걸려 죽은 어린시절 여자친구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일본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유명한 대사가 생각난다. 남자주인공 사쿠는 나레이션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벌써 17년이나 살고 있다."
사쿠의 착찹함 못지않은 기분으로 허진호의 최신작을 봤다.
중간중간 몇가지 프로젝트에 참가해 영화를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접하지는 못하던 터였다. (아마도 조조로) 롯데시네마에서 대성선배랑 봤던 <외출>(2005)은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배용준의 캐스팅과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질펀한 분위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애와 이별 앞에서 솔직하고 냉정하던 이영애는 너무도 인상적이었지만, 사랑받는 것과 사랑하는 것, 배신을 당하는 것과 배신하는 것 앞에서 무력하고 죄인같던 손예진은 조금도 신선하지 못했다. 연애하다 이별하는 커플이야기가 결혼 후 불륜을 저지르는 이야기로 설정상(관람등급상) 진일보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행복>(2007)은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를 환멸적으로 섞어놓은 것 같은 영화였다. "자기 환멸에 대한 묘사는 부족하고, 사랑의 숭고함은 넘치는" 영화라는 허문영의 평 한 문장으로 전체 감상이 백프로 설명된다.(난 왜 이런 문장이 생각나지 않는거지ㅠ.ㅠ) 자기환멸은 영수(황정민)를, 숭고함은 은희(임수정)로 대변될 수 있다.
영화에는 세 번의 암전이 나온다. 남자주인공 영수의 삶의 방향이 날카로운 선으로 꺽일 때마다 영화는, 연극에서 막을 나누듯 검은 화면(-)을 집어넣지만 도식적일 뿐이다. 서울에서의 영수 - '희망의 집'/은희와 동거 중인 영수 - 은희를 버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영수 - 병세가 악화돼 입원해 있다 은희의 임종을 맞이한 영수/다시 '희망의 집'으로 가는 영수. 첫 번째 암전만 좀 인상적이었다. 빈 검은 화면이 터널을 지나는 버스의 까만 유리창으로 변하는 장면. 그러나 보통 터널을 지날 땐 버스의 조명을 켠다는 생각을 하니 바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은희가 영수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도 공감이 가지 않아 돌려보았을 정도다. 체조할 때 돕고, 라면이랑 술 먹는 것 걸리고, 반가워요 춤추고 등등 에피소드야 자잘하게 이어졌지만 나중에 기억에 남는 장면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가장 탁월한 점은 캐스팅이다. 술먹고 담배피고 방탕하게 살아서 간경변에 걸린 영수는 새까만 얼굴의 황정민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숨차거나 감기걸리면 죽을 수도 있지만 늘 긍정적이고 밝으면서도 강한 은희는 뻬쩍말라 하늘거리는 팔다리를 가진 임수정 이미지에 딱이다. 그 밖에 억지로 웃는 거 시키고 행복이란 단어를 달고다니는 다소 요상한 억양의 요양원 원장으로 나온 신신애도 괜찮았다.
# 명대사 1) 은희 (섹스하기 직전) "영수씨 나 숨차면 죽을 수도 있어요" 2)수연 "그냥 술마시고 얘기해. 너 그런 짓 잘하잖아."
# 인상적인 장면 1) 샛노란 장판 위에 그야말로 시골틱한 털실 옷을 입고 얼굴을 붙이고 누운 영수와 은희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은 장면은 색감과 분위기가 한 장의 일러스트를 생각나게 했다. 2) 수의를 입고 죽어있는 은희의 손발을 묶고 눈, 입 등을 싸는 수시과정을 바라보며 우는 영수. 샷-리버스 샷으로 찍지 않고 영안실 안쪽에서 바깥과 연결된 유리창을 찍은 화면. 영수의 얼굴 위로 장례절차가 비쳤고, 자기가 은희를 죽인 것 같은 황정민의 우는 연기는 훌륭했다.
# 그 외 생각난 것 1) 요즘 공효진의 배역 스타일. <가족의 탄생>과 <M>은 모두 이 영화처럼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자존심 강한 역이었다. 얼굴 때문인가 이미지가 늘 딱부러지면서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에 머무르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