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누구나 소수가 되고 다수가 된다.
어느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누구나 장애인이 되고 비장애인이 된다.
왼손잡이, 근시, 색맹, 난독증, 난임, 주의력 결핍...
20세기 초, 왼손잡이는 '악마의 손'으로 여겨졌다. 이는 교정의 대상이었다.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근시들 또한 '전투수행 불능자'로 구분되었다. 이들은 징집 불가자들이였다. 난임 또한 오랜 세월동안 '장애'로 여겼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모의 고통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출산하지 못하는 아내는 7년 후에 폐출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다.
지금 생각해보건데, 무엇이 장애고, 무엇이 아닌가.
과거 '장애'로 구분하던 것들의 상당수는 현대인들에게 너무 흔한 증상들이다.
왼손잡이는 때로 '좌뇌'와 연결되어 권장하는 부모가 있을 정도다. 근시 또한 시력교정을 통해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이들에게 '똑똑할 것 같다'는 이미지를 가져다 씌우기도 한다. 난임 또한 고통에 있어 국가와 사회가 함께 하고자 한다.
'장애'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주관적인 언어다.
과거에는 그랬고, 지금은 아니던 것, 지금은 그렇고, 과거에는 아니던 것이 어떻게 '진리'일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장애'는 언어가 만들어낸 '허상'에 가깝다.
나의 경우, '글씨체'에 대한 매우 큰 컴플렉스가 있다. 사회 생활 초기에 직장 상사로부터 글씨체 지적을 받았을 정도다. 이런 컴플렉스는 실제로 사회생활 중 일부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다시말해서 '그 부분에 있어서' 나는 명확하게 장애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어떤 장애는 명확히 눈에 보인다. 손이 없거나, 팔이 없는 경우도 있고, 다리가 없는 경우도 있다. 다만 어떤 장애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가 오랜시간 쌓아 왔던 다양한 데이터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증상'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증상'이 더 다루기 어렵다.
'고정욱' 작가의 '어릴 적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이라는 수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굴뚝에 들어간 두 아이 중 한 명의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다면 누가 먼저 얼굴을 씻을까."
상대방의 얼굴에 검댕이 묻은 것을 본 아이가 씻지 않겠는가. 그렇게 이미 깨끗한 쪽은 본인을 닦고, 검댕이 묻은 쪽은 상대를 보고 안심할지 모른다. 결국 우리는 상대를 보고 자신을 파악한다. 본인이 완전하다는 착각에서 기인한 '장애'라는 표현은 그 단어 자체가 그다지 완전한 표현은 아닌 셈이다.
고정욱 작가는 포클레인이 땅을 팔 때 엔진만큼 중요한 것이 묵직하고 거대한 돌이라고 했다. 자신을 지상으로 잡아 줄 무게중심이 없다면 외부의 무게에 흔들리는 것은 본인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내부에는 묵직하게 무게 중심을 잡아둘 거대항 돌덩이 하나씩이 가슴에 얹혀 있다. 그 무게추는 본질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중심이 된다.
유전학자 크레이그 벤터는 '모든 인간은 유전적으로 변이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본래부터 서로 다르고 다르다는 것은 사실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50년대 미국 공군은 비행기 조종석을 설계하기 위해서 조종사들의 평균 체형을 바탕으로 좌석을 설계했다. 다만 이상하게도 조종사들의 실수와 사고율이 크게 줄지 않았다. 이후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단 한명의 조종사도 그 '평균값'과 딱 맞는 사람이 없었다.
평균이 주는 착각이 그렇다. 기준선이라는 것은 참으로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시력 2.0을 기준으로 두면 1.0도 장애다. 신장 180cm를 기준으로 두면 180cm도 장애라고 볼 수 있다. 다수가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소수는 외면 당한다. 그러나 기준점이라는 것은 워낙 다양하게 찍을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라 우리 모두는 다수인 동시에 소수가 된다.
고정욱 작가이 말처럼, 우리 안에 있는 돌덩이는 삶의 무게를 견디게 해주는 중심축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과 결핍, 컴플렉스와 트라우마, 그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토대가 된다.
결국 인간은 완전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때때로 가장 큰 변화는 그 불완전함에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