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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미의 초등생활 상담소
  • 조선미
  • 16,650원 (10%920)
  • 2024-01-23
  • : 8,673

육아서적을 읽는데 이처럼 단호한 문장을 만날 거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지시에는 이유가 필요없다."

'조선미의 초등생활 상담소'를 읽다가 보게 된 문장이다. 이처럼 현실적인 말이 있을까. 특히 최근 모든 것을 아이에게 설득시키고 설명하라는 '착한 부모(?)'가 유행하는 시기에 '조선미 교수'는 말한다.

'설득하려고 하지말고 지시하라'

아이를 기름에 있어 '설명과 설득'보다 빠른 판단이 더 중요해진다. 부모의 단호함이 아이를 더 보호할 때가 있다는 의미다.

차도에서 놀고 있는 아이에게 '지금 덤프트럭이 다가오고 있으니, 어서 안전한 쪽으로 오는 게 어떻겠어?'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설득, 설명할 수는 없다. 때로는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의 옆구리를 걷어 차는 바가 더 아이를 보호하는 바일 수도 있다.

'지금 그만해'라고 말할 때, 수십 가지 이유는 필요 없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고로 '지시에는 이유가 필요없다. 아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아이가 하면 안되는 일을 할 때, 거기에는 이유가 필요없다. 해야하는 일은 그냥 하는 것이고 하면 안되는 일은 그냥 하면 안되는 것이다. 잘못한 일에 '왜 그랬어?'라는 이유도 필요없다. 잘못한 일은 '잘못된 일'이라고 알려주고 설득할 필요가 없다.

'친구를 때리면 안돼'

'왜 안되는데?'

부모가 설득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면 아이는 그 행동을 고치지 못한다. 혹은 부모의 설명이 완전하지 못하면 그 역시 아이는 다른 이유로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고로 아닌 건 아니다. 이유는 없다. 그냥 아니다. 부모가 기준이 되어 '옳고 그름'을 만들어주고 아이에게 기준이 생기면 그 뒤에 설득과 설명이 필요하다.

'조던 피터슨'의 '인생의 12가지 법칙'에는 비슷한 부분이 있다.

바로 다섯 번째 법칙이다.

다섯 번째 법칙,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아이가 반복해서 선을 넘을 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모의 단호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피터슨 또한 이 법칙을 통해 강하게 말했다. '훈육은 부모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말이다.

'아이에게 제한을 주지 않으면 결국 세상은 그 아이를 미워하게 된다.'

그것이 지금 당장 아이가 받을 상처보다 더 큰 상처가 된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친구 관계 속에서, 아이는 끊임없이 경계를 요구 받는다. 그때마다 좌절하지 않으려면 집에서부터 경계를 배워야 한다.

부모가 '설득과 설명'으로 아이의 잘못을 고쳐 줄 수는 있다. 다만 냉정히 말해서 사회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과거 스탈린은 이런 말을 했다. '한명의 죽음은 비극이다. 다만 백만명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다.'

냉정히 말해서 '회사 인사과'에서 일하다보면 '사람'이 '사람'으로 보여지 않을 때가 있다. 들어온 이력서를 '엑셀'로 불러오기 오기하고, '나이 순 정렬' 그리고 특정 나이대를 제외하고는 그자리에서 삭제 해 버린다. 성별, 학력으로 정렬 후 몇 번을 삭제하고 난 뒤, 남는 인원만 '면접'으로 불러도 며칠 간 면접을 진행해야 할 정도다.

그 삭제된 수십, 수백 건의 이력서에 '자소서'라던지, '자격증' 따위는 솔직히 말해 '면접진행자'들에게 관심없다. 사회는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 또한 타인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는가.

학교만 가더라도 교사는 아이 하나 하나에 초점을 두고 관리할 수 없다. 본래 '인사'라고 하는 것은 일대일이 아니라 일대다수다. 고로 냉정하지만 그렇게 진행할 수 밖에 없다. 때로 우리 아이는 이런 냉정함에 노출되어야 한다. 온실속 화초는 크게 성장할 수는 있지만 온실 밖에서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지 알수는 없다.

조선미 교수의 말도 비슷하다. 아이가 친구를 밀쳤을 때, 엄마가 '왜 그러했어? 엄마는 속이 상해'라고 말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오히려 단호하고 조용하게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이들은 감정을 다루는 기술이 없다. 고로 훈육은 설명이 아니라 '경계'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 경계는 부모가 기준이다.

'기준이 너무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 아닌가요?' 그렇다.

본래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것은 '법'과 다르게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이 맞다.

몇살부터 아저씨고, 몇살부터 삼촌인가. 그런 건 없다. 그저 각자의 기준이 있고 아이는 그 기준을 부모로 부터 배워야 한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자인 제롬 케이건은 '규칙이 없는 아이는 불안하다'라고 했다. 아이는 자유를 원하지만 동시에 적당한 '규제'도 필요하다. 실제로 2013년 미국 심리학회지인 APA에 따르면 일정한 규칙과 처벌이 일관되게 적용될 경우, 아이의 자기 통제력과 충동 조절능력이 유의미하게 향샹된다는 내용이 있다.

반면 부모가 지나치게 아이의 감정을 배려하거나 훈육을 피하게 되면 아이는 상황판단보다 '자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된다. 훈육은 사랑의 다른 형태다. 그 방식이 꽤 사랑과 멀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때로는 달콤함 보다는 씁쓸함이 더 건강하게 하는 법이다. 설명은 물론 중요하다. 다만 이는 훈육의 보완제이지 본질이 아니다.

왜 골고루 먹어야 하지?

왜 양보해야 하지?

왜 공부해야 하지?

왜 열심히 해야하지?

왜 노인을 공경해야 하지?

왜 친구를 도와야 하지?

왜 약속을 작 지켜야 하지?

왜 살아야 하지?

그런 건 없다. 거기에 이유가 부여되는 순간, 이유는 반대의 명분이 된다. 이후 비극만이 남는다.

본래 삶의 대부분에는 이유가 없다. 이유를 찾지말고 그냥 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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