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뛰어든다.'
이어령 선생의 말이다.
'말'은 어떻게나 할 수 있다. 그렇게 꾸며 낼 수 있고 없던 일도 있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창세기'의 시작이 '말'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있어라'하면 '있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고, '없어라'하면 없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소설가의 '말'인 '글'은 없는 인물과 세계를 만들어내고 정치가의 '말'은 '정의'를 만들어낸다. 다만 그것은 '말' 속에서 '존재'가 증명될 뿐이다.
'손'에 뜨거운 것을 쥐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뜨겁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때에 따라서 그것을 '차갑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말을 믿거나 직접 만져 보는 수 밖에 없다.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언제든 만들어질 수 있다. 말을 의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말'을 넘어서는 '진리'가 보여질 때가 있다. '쥐고 있는 뜨거운 것'을 화들짝 놀라며 떨어뜨리는 행위가 그렇다. 보통의 진실은 그렇게 '말'이 아니라 '행위'에서 나온다.
누구나 운동도 하고 건강한 것도 먹으며 규칙적인 삶을 살고 싶다. 정신 건강에 좋은 책도 많이 읽고 건강한 인관관계를 쌓으며 살기를 원한다. 그런 바람에 항상 따라 붙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말이야 언제든 할 수 있는데, 행동이 쉽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말은 상대를 속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책도 읽고 싶은데...'하면서 정작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정작 하고 싶은 것은 '독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만 정작 속지 못한다.
사람의 진심을 보기 위해서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말'이란 '정직'의 재료로 만들어져야 한다. 상대의 말에 '정직'이라는 '재료'가 쓰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실'을 증명해내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사용하고 살아간다.
행동, 즉 삶은 그 증명이 너무나 어렵다. 혹은 너무 오래 걸린다. 고로 쉽게 창조해 낼 수 있는 '말'이야 말로 '진실'을 은폐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다.
고로 사람의 말이 진실을 담았었는지는 '행동'과 '삶'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어령이라는 인물은 어떤가. 이어령이라는 인물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 시대를 건넜던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말이 진실을 담았다는 증거가 됐다. 그는 많은 말과 글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많은 '침묵'과 '행동'을 남겼다.
그의 인생은 문장처럼 가지런하지 않고 단어처럼 명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흐르고 흔들리며 때로는 부서지곤 했다. 그 증거가 말에 힘을 싣는다. 스는 말의 사람이었지만 말에 속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글의 장인이었지만 글을 의심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를 항상 경계했다. 자신이 말이 그럴듯한 허구가 되지 않도록 그냥 그 강물로 들어간 사람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과 글이 모두 거짓으로 의심받지 않기 위해 꾸준하게 행동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그렇게 그가 보여준 것은 단 하나다. 진실은 말보다 늦다는 것. 그리고 진실은 늘 삶의 모양을 하고 온다는 것. 아무리 유려해도 그 문장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말이란 결국 삶을 부를 수 있는 단초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령이라는 이름은 그 말이 어떻세 삶으로 번역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오랫도록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이제 우리에게도 비슷한 숙제가 주어졌다. 그처럼 '말'의 시대에 살면서, '말'에 속지 않는일, '말'로 속이지 않는일.
'강물을 사랑한다면, 말로 형용할 것이 아니라 바로 뛰어드는 일'
바로 그것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