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자아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 입니까?"
"남자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성별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ㅇㅇㅇ 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이름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한국사람입니다."
"국적을 바꾸면 당신도 바뀝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제가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의 결정체 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씩 잃어간다면, 마지막에 남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름을 지우고, 직업을 지우고, 관계를 지우고, 기억가지 지워도 남는, 그 끝에 남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다. 명상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출발한다. 만약 당신이 화가 난다면 '당신'이 화가 났는가. 아니다. 당신은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다. '당신'이 기쁘다면 정말 '당신'이 기쁜가. 아니다. 당신은 '기쁘다'라는 사실을 깨다는 이다.
우리는 '관찰자'다. 감정을 인식하는 자다. 생각 자체가 아니다. 그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지켜보는 자다. 명상이란 이 사실을 훈련하는 것이다. 김주환 작가는 '내면소통 명상수업'에서 반복한다. '그 감정은 당신입니까' 우리는 쉽게 감정에 휘둘린다. 불안하면 내가 불안이고, 화가나면 내가 분노 그 자체가 된다. 다만 관찰자는 다르다.
'감정'이라는 것의 '생물학적 원리'를 쫓다보면 그 핵심에는 '편도체'가 있다. '편도체'는 원시시대부터 이어져온 경고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과거 우리를 생존하도록 진화해온 뇌의 경보장치다.
인류의 역사를 100이라고 잡을 때, 우리가 농사를 짓고, 도시를 세우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봐야 5 정도 된다. 넉넉히 봐도 10이다. 나머지 90에서 95정도는 산과 강을 옮겨 다니며 짐승에게 쫓기고 쫓던 수렵 채집의 시대였다. 인류 역사 100 중에 약 90~95는 수렵 채집 시절이다. '현대인'을 기준하면 더 짧아진다. 지금의 우리가 '현대 사회'를 기준으로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 명백하다. 현대 사회는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무엇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는가. '뇌'는 생존을 위해 진화됐다. '포식자'의 위협에 반응하도록 설계됐다. 재빨리 위기를 파악하고 이를 '신체'로 '반응'했다. 소리를 듣자마자 뛰고, 그림자를 보자마자 도망치고, 낯선 소리와 냄새를 맡으면 긴장했다. 이 모든 것이 '생존가능성'을 높였다. 여기에는 '판단'이 아니라 '반사'가 필요해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움츠려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과거 우리의 생존력을 높였던 '편도체'의 역할 덕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느릿한 진화와 반대로 환경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현대사회에 사자는 없다. 창 밖에 맹수도 없다. 다만 회의실 문을 열면 진땀이 나고, 시험지를 받으면 고통스럽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의 눈빛에 온몸이 굳기도 한다.
위협없는 현대 사회에서도 편도체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 이게 우리가 매일 감정에 휘둘리는 이유다. 어떤 환경은 뇌의 깊은 곳에서 '위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판단은 '논리'가 아니라 '반응'이다. 그것이 감정이다. 문제는 그 '위험'이 '실체'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뇌는 '상상'만으로도 반응한다. 기억만으로도 편도체는 활성화된다. 사자가 눈 앞에 있던, 진상 고객이 눈 앞에 있던 뇌는 똑같이 위협으로 여긴다.
이 즈음에서 'Why Zebras Don't Get Ulcers'라는 책의 이야기가 나온다. Ulcers는 '위궤양'이라는 뜻으로. 왜 얼룩말은 인간과 다르게 스트레스에 노출되어도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로버트 사폴스키는 말했다. 얼룩말은 '사자'가 눈앞에 있을 때만 도망간다. 즉 위협이 일시적이라는 의미다. 얼룩말이 처한 상황은 일회성으로 끝난다. 얼룩말은 사자의 위협에서 먹히거나 살아 남는다. 그리고 위협이 살아지면 다시 편하게 초원에서 풀을 뜯는다. 즉 지속 가능하지 않은 스트레스라는 의미다. 단 인간은 사자가 없어도 사자를 만들어낸다. 불안을 되새기고 후회를 곱씹고, 상상의 위협을 끝까지 키운다. 편도체는 실재와 허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고로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지만 인간은 위궤양에 걸린다. 사라지지 않는 감정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김주환 작가는 감정을 없애려고 하지말고, 억누르거나 쫓아내지 말고 '알아차리는 훈련'을 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내면소통'이다. 즉 우리는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감정을 인식하는 주체다. 그 사실을 인지하면 된다.
이렇게 우리가 감정을 인식하는 주체가 되면 실제로 뇌는 변화가 일어난다. UCLA의 리버맨 박사는 감정 라벨링 실험을 통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편도체의 반응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이런 습관은 전전두엽을 활성화 시킨다. 단지 '화가 났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말로 표현한 것만으로도 뇌는 차분해진다. 그러니 명상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훈련이자 생리학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훈련의 최적 시간대가 있다. 바로 잠들기 전이다. 신경가소성이라는 말이 있다. 뇌의 변형이 언제든 가능하다는 의미다. 뇌는 새로운 회로를 만들어낸다. 이 작용은 깨어 있을 때보다는 자고 있는 동안 더 활발하게 일어난다. 하루 동안의 감정과 기억, 경험이 재정리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낸다. 그 직전에 연결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자기 적전 상태'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잠에 드는지는 뇌의 설계를 바꾼다.
김주환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잠들기 전에 반드시 스스로에게 좋은 말을 건내라'고 말한다. 어쩌면 마법과 같은 결과가 꽤 뇌과학적인 이유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도 잘 견뎠다'
'실수했지만 괜찮다'
'나는 충분히 나아지고 있다'
뇌는 그 말을 기덕한다. 그 기억은 새로운 회로가 된다. 또한 그것이 반복되면 습관이되고 습관은 성격이 되며, 성격은 삶의 형태가 된다. 그것이 '운명'을 결정한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당신의 성격이 아니다. 당신이 살아온 흔적도 아니다. 기질도 아니고 직업도 아니다. 감정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인식하는 존재. 그 흐름을 지켜보는 존재이다. 그것이 진짜 자아다.
'내면소통 명상수업'은 이 자아를 되찾는 훈련이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가장 마지막에 남는 그 정체성. 그것이 '진짜, 참나'이다.
'모든 이름을 다 지웠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는 그것. 당신은 누구입니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