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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순
  • 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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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01
  • : 146,331

'행복하다'

어떤 이유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에 나머지가 이유가 된 것이다.

'불행하다'

어떤 이유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기에 나머지가 이유가 된 것이다.

최근 읽은 '미움받을 용기', 이후 소설이라 그 연장선에서 이해가 됐다. 과거를 반추해보면 꽤 괜찮을 법한 결말이 보이는 선택이 있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은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돌이켜 보건데, 어떤 선택을 했건 행복과 만족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선택으로 생겨난 다른 '우주의 나' 또한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며 '지금의 나'를 떠올려보고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축구 경기가 되면 자신이 원하는 곳에 공을 차는 친구의 능력은 '신의 능력'이었다. 그는 항상 원하는 곳에 공을 찼고, 그 공은 여지없이 그곳에 떨어졌다.

친구의 능력을 부러워하던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원하는 곳에 공을 차는 방법이 궁금해.'

친구는 답했다.

'원하는 곳에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공이 간 곳에 만족하면 된다.

그랬다.

친구와 나의 가장 큰 차이는 '결과'를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결과'를 해석하는 능력에 있었다. 나의 불만족은 아주 높은 확률로 정해져 있었다. 내가 '메시'나 '호날두'가 아닌 이상, 내가 찬 공에 만족할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상대적 능력치를 비교하기에 친구와 나는 물론 실력차이는 있으나, '메시'나 '호날두'처럼 프로 선수에 비교하기에, 그 절대적 능력치는 '오차범위'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제 '실력'을 높이거나 혹은 '만족'을 높이거나 둘 중 하나다.

축구라는 것이 어쩌다 한 번 친구들과 체육시간 혹은 취미 생활로 볼 한 번씩 차는 일인데 프로 선수만큼의 능력은 필요 없다. 고로 '실력'을 높이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만족'을 높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선 '실력'을 높여야 한다. 다만 삶에서 범인이 천재만큼 능력을 갖는 것은 가당키나 할까. 대체로 능력은 그만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능력이 '최상'이면 좋겠지만 세상에는 '최상'의 능력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일회용 커피 믹스를 '잘 젓는 능력'은 완벽하게 프로 수준에 닿고 있으나, 약간의 녹지 않은 알갱이가 떠 있으나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우리를 이루고 있는 삶의 전반은 '완전한 수준'이 아니라, '적당한 수준'의 능력만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배우게 된 것이 '만족하는 능력'이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수 천번은 돌려봤던 '세븐틴 어게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과거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은 선택의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살아가는 영화다. 주인공는 항상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러다 다시 '운명'이 그에게 다시 선택할 기회를 줬고 이유야 어찌됐건 주인공은 다시 같은 선택을 한다.

후회해봐야 부러워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돌아가더라도 상대가 되더라도 나는 다시 지금의 나의 자리를 찾을 것이다. 고로 지금의 나는 언제나 '최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불운과 불행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지도 않고 실수와 잘못으로 채워져 있지도 않다. 그냥 그러한 것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 연필로 쓴 무언가를 지우는 물체에 '지우개'라는 이름을 짓고 얼굴의 양쪽에 붙어 청력을 담당하는 기관에는 '귀'라는 이름을 지었다. 다수가 합의한 것에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빨강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파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빨강'이라는 이름은 맞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파랑이라는 말이 맞을까. 아니다. 그것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빨강일수도,파랑일수도 있으며 더 깊게 생각해보기에, 누군가에게는 빨강이고, 누군가에게는 파랑일수도 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말을 잃어버린 노인의 이야기다. 잃어버린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돌아온다거나, 그 말을 타고 놀다 떨어진 아이가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부러진 아이가 군대에 면제가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모든 상황은 '좋음'과 '나쁨'으로 번갈아가며 이름을 바꾸는데, 거기에 '좋음'과 '나쁨'이라는 이름이 과연 존재하냐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름'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저 그 자체이지는 않을까. 초나라 시대, 무엇이든 막는 방패와 무엇이든 뚫는 창을 팔던 장사꾼은 결국 자신의 말에 모순을 발견한다.

모순은 결국 어느 하나가 진실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는다. 둘다 진실이라는 것도 아니며 둘다 거짓이라는 것도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진실이 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모순이 되기도 한다.

뚫리지 않는 방패와 무조건 뚫는 창의 이야기는 결국 두 창과 방패가 만나야만 증명할 수 있다. 전장에서 만날 두 병사가 초나라 한시장 바닥에서 같은 무기장수에게 각각 방패와 창을 사지 않는다면 증명이 어려운 이야기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지 않기에 누군가를 부러워 할 수 없다. 과거에 다른 과거를 선택해 보지 않았기에 다른 현재를 생각해 볼 수 없다.

고로 어찌됐건 지금과 여기는 '나'의 최선이고 비교 대상이 없는 이상, 그 누구도 그 어떤 예상도 '나'보다 나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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