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나는 계약직 은행원으로 일하다 대학원에 가고 싶어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영문과 수업을 듣게 된다.
그 수업의 젊은 강사인 그녀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가 쓴 에세이도 몰래 구해 읽고,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학생들에게 분노하기도 한다. 그녀는 용산구 참사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고 나도 용산구 주민이라 이를 기억한다. 그녀는 나에게 따라가고 싶은 빛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33쪽)
ㅡ 김연수의 소설(이토록 …)에서도 이런 비슷한 내용이 나온 것 같다. 안타까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난 희원씨가……”
(중략)
나는 그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종종 상상해보곤 했다.
(중략)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다음 문장이 어떻게 완성되었을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떤 문장이든, 그녀는 내가 자신보다는 나은 경험을 하기를, 자신이 겪었던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자 힘이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자신의 조건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인정은 하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 마음이 그녀를 지켜주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동의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마음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42-43쪽)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44쪽)
ㅡ 수많은 선배들을 보면서 힘을 얻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그녀들의 마음 또한 복잡할 것이고, 나 또한 후배들에게 그런 빛이 되어주지는 못하리라는 좌절감도 든다.
<몫>
1990년대 말 대학가의 운동권과 여성주의 운동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
그때 대자보를 쓰고 집회에 나갔던 나의 선배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대부분 말과 글,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라 어느덧 그들이 욕하던 기득권이 되어 있지. 나 또한 자유롭지 않고.
<일 년>
그녀는 회사 정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알게 되고 같이 일하게 된 계약직 다희를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치면서 그녀와 가깝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다 멀어진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답신>
나를 챙겨주던 언니는 고등학생 때 접근한 선생과 이른 결혼을 하게 된다. 그 선생은 좋은 사람이 아니기에,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기에, 그러나 언니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결혼생활도 행복하지 못하다. 그러다가 나는 언니가 답답하고 형부가 미워서 형부를 다치게 하고 마는데, 언니는 재판에서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여 나는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언니 가족과도 절연하게 된다. 출소 후 뒤늦게 언니의 사랑을 깨닫고 돌이켜본다. ”언니를 내려다보며 언니의 죄를 묻고 언니를 내 마음에서 버리고자 했지. 그때 내 마음에서 나는 옳고 언니는 그르고, 나는 맞고 언니는 틀리고, 나는 용감하고 언니는 비겁하고, 나는 독립적이고 언니는 의존적이고, 나는 떳떳하고 언니는 비굴하고, 나는 배려하고 언니는 이기적이고, 나는 언니를 지켰고 언니는 나를 버렸지. 모든 것이 분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175쪽) 그리고 지금은 스물셋이 된 언니의 아이(나의 조카)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ㅡ 형부가 너무나 혐오스럽게 그려져서 나도 화자에 이입해서 함께 분노하게 되었던 소설. 등장인물들의 감정묘사가 특히 섬세하다고 느껴졌다.
<파종>
나는 이혼 후 아이 소리를 데리고 열다섯 살 위인 오빠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생활하게 된다. 오빠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대신에 나를 돌봐주었는데, 나이를 먹어서 나와 소리까지 함께 돌보며 텃밭을 가꾼다. 소리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 아이었는데, 오빠로부터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고 나서는 달라지게 된다. 오빠는 이후 병으로 죽게 되었고, 나와 소리는 그로부터 5년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내지만, 나는 소리의 자퇴 결심을 듣고 소리의 상실감을 이해하고 나의 상실감도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나와 소리는 다시 그 텃밭을 가꾸며 오빠를 그리워한다.
<이모에게>
엄마를 대신해서 나를 돌봐주었던, 엄마보다 스물두살이나 더 많던 이모에게. 이모는 나를 예뻐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엄격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사람이어서, 나에게도 그런 모습을 강요했다. 나는 그런 이모에게 애증을 느끼면서도 어느새 이모 같은 어른으로 자라나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파일럿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모를 만나지만, 현실은 꿈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이모와의 재회는 다시 불편하고 화가 나는 경험이 되지만. ”이모가 용기를 내서 말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이모는 칭찬하는 법을 몰랐으니까. (중략) 그래서 나는 이모의 마음을 알았다. 이모가 사실은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대견해한다는 걸. 직접적인 칭찬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해지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모가 그렇게 말하자 목이 메었다.(254쪽)“ ”이모를 은근히 무시하고 하대하는 아빠의 모습에 분노하면서도 나는,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은 언제나 이모를 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뭐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군다고 삐딱하게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모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내 모습을 부정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모의 몇 벌 되지 않는 옷가지들을 만지면서 나는 그것 또한 나의 모습임을 인정했다. 그러한 판단이 이모라는 사람의 진실과는 무관하다는 사실도.“(263쪽)
ㅡ ’나’를 돌보아주는 사람에게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시하고 낮게 보는 마음에 대하여, 그리고 뒤늦게 그 사랑을 깨닫는 것에 대하여, 이 작품집에서는 자주 그리고 있다. <답신>에서 나의 언니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모에게>에서 나의 이모에 대한 태도에서도.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우경의 어머니 기남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면서도 괘씸하다. 그러나 나도 여기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리라.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기남은 딸 많은 집 다섯 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 식모로 다른 집에서 크다가 독립하여 이혼남과 결혼하여 그의 전처 소생인 진경과 직접 낳은 우경을 기른다. 진경은 연구원이라지만 우울을 이기지 못하여 알콜중독이 되었고, 우경은 언니를 경멸하고 가족을 경멸하더니 미국으로 혼자 건너가 재미교포와 결혼을 하고 홍콩에 살면서 기남을 초대한다. 우경은 영 성격이 좋지 않다. 자기 집에서 일하는 시터 제인에게도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기남은 홍콩을 헤매다가 딸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리고 우경이 자신보다도 시어머니와 친밀한 모습을 보이고 더 의존하는 것에 서운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손자 마이클과의 대화를 통해 따뜻함을 느끼고 그 순간의 소중함을 느낀다.
”할머니, 부끄러워요?
“……응, 그런가봐.”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다정하구나.”
“맞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너무 다정해. 한국 할머니처럼.”
“정말?”
“근데 너무 다정하면 안 된대요.
마이클이 잠시 기남을 보다 말을 이었다.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나갔다. (318-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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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최은영의 소설들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녀의 인물들이 너무 ‘약하다’는 평을 듣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 또한 심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이다보니, 그녀가 그리는 인물들을 너무나 알겠고
그가 그리는 섬세한 심리에 나의 감정이 함께 요동치기도 한다.
소설은 윤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것을 건드리는 것이 소설의 기능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라,
조심스럽게 읽는 이의 윤리의식을 끊임없이 건드리는 그녀의 소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