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파키스탄과 아일랜드의 자수성가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다가 미국의 명문 사립고등학교인 세인트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불평등 문제를 연구하다가, 졸업 후 10년만에 모교인 세인트폴로 돌아가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조사한 것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
저자는 처음 학교 기숙사에 배정받았을 때 예상과는 달리 기숙사에 온통 소수인종만 있는 것을 보고 불만을 품고, 학교에서 만나게 된 엄청난 부와 특권을 가진 상류층 친구들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소수 학생 기숙사에서 느꼈던 놀라움과 엘리트 학우들 사이에서 느꼈던 불편함'으로 인하여(19쪽) 불평등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되었다.
'왜 엘리트 학교교육이 어떤 이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초인적 힘을 발휘해 성취해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인가? 왜 어떤 배경의 학생들에겐 학교생활이 너무 편안하고 쉬운 일인데, 어떤 학생들에겐 끊임없이 악전고투해야 하는 일처럼 보이는가?'(19-20쪽)
미국은 개방성과 접근성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수용하고, 그 범위를 넓혀왔지만, 그럼에도 미국사회의 불평등 수준 또한 높아졌다.(21쪽) 엘리트 대학의 입학생들은 인종적으로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지만 동시에 점점 부유한 학생들로 채워지고 있다.'개방성과 불평등이 함께 증가하는 이런 이중적 변화' 우리는 '개방성을 다양성으로, 다양성을 인종적 다양성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문제는 계급이다.'(24쪽) 그런데 한 사람의 미래 소득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변수 중 하나가 바로 교육 수준이다. 학력은 부를 쌓는 데 중요하다.(25쪽)
사실 엘리트 학교들은 특권층 부잣집 도련님들의 집합소에서 벗어나 사회 전반의 재능 있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 되고자 노력해 왔다.(25쪽) 이러한 노력들은 '재능에 따른 능력주의를 확립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타고난 적성을 평가하고자 하는 SAT 같은 시험들 역시 이런 이상에서 나온 것이었다.'(26쪽)
그러나 이 나라의 부와 권력에 대한 엘리트의 지배력은 점점 더 공고해지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능력'(merit)이란 게 결코 선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은 대단히 맥락 의존적이다. 능력에 대한 정의는 문화적, 제도적 맥락에 따라 변화해왔다.(26-27쪽)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을 만들어 낸 마이클 영은 1940년대 영국 노동당으로부터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역량이 허락하는 한 최상의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교육체계를 도입하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곧 그런 교육이 고취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상에 대한 일종의 기술관료적 접근에 냉소적인 입장이 되었다. 즉, 능력주의는 역량의 냉혹한 과학화요 재능의 관료화라 생각했던 것에 대해 혹평하는 의미에서 고안해 낸 말이었던 것이다.
능력주의는 사회 적재적소에 개개인을 선발해 쓸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들의 재능을 식별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27쪽), 이 같은 방식이 불러온 파장은 꽤나 모순된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성과 외의 요인을 고려한 차별시정조치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고, 이미 부유한 자들의 지속적인 소득 증가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과라는 게 단순히 개인적 특성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런 능력주의는 '결과의 차이를 사람들이 만든 조건의 산물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에 따른 산물로 보이게 만들면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구분(차별점)들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29쪽)
저자는 세인트폴이 어떻게 학생들에게 '능력주의적' 특성을 심어주는지 보여준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능력은 실상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학교는 개방성을 내세우지만 여전히 부유한 학생들이 지배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이 능력주의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직화되면서, 이 결과는 조건의 차이가 아니라 적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다.
저자가 세인트폴에서 발견한 것은 '특권의식의 오만함이 아니라 특권의 편안함이었다.'(30쪽)
'그들은 세인트폴 같은 곳에 입성하는 데 중요한 것은 노력이며 자신들의 특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누구나 자신들처럼 될 수 있으며 계급 상승의 가능성은 이 나라에서 언제나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동료들을 둘러보면서 그들이, 자신들이 옳다는 걸 입증해주는 경험적인 증거라고 여긴다.'(37쪽)
'나는 세인트폴의 교육이 특권의식 대신 점점 더 특권을 길러주는 쪽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신엘리트들은 특권, 즉 그들을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자아의식과 상호작용 양식을 개발한다. 스스로를 훨씬 더 개별화된 존재로 생각하며, 현재 자신의 위치가 자신이 해온 노력의 산물이라고 본다.'(37쪽)
그들은 노력과 재능에 열린사회에 대해 배우고, 한편으로 위계에 대해서도 배운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당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도 상호작용해야 하는데, 대등한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친밀감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위계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는 것이다. 위계가 너무 고정되어 있거나 존재감이 크면 닫힌 사회여서 노력과 재능이 아무 의미 없어지므로 위험하고 정당성이 없어진다. 따라서 학생들은 위계가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지 제한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는(공정한 것이라는) 감수성과 그런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법을 배운다(39쪽)
그러나 이미 특권을 가진 학생들에게도 세인트폴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학교에서 자신의 자리를 배워나갈 때 학생들은 그들이 받은 유산이 아니라 경험에 의존한다. 특권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개발하고 길러가야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함양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처신할지에 대한 감각이다. 이런 특권의 실천에 있어 핵심은 편안함, 즉 거의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도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문화에 대해 열린 취향, 잡식성을 드러낸다. 역설적이게도, 배타성은 위계적 열린사회에선 오히려 패자의 표식이다(제한된 취향, 지식, 기질 때문에 새롭게 열린 세상의 과실을 얻지 못한다는 논리로). 이러한 특권은 체화되어 기회의 차이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기술, 재능, 역량 같은 것으로, 즉 '그 사람 그 자체'로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성공에 필요한 것들을 선천적으로 갖춘 듯 보인다. 이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차별점들을 자연화함으로써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 불평등을 은폐하는 데 일조한다.'(41쪽)
1856년 뉴햄프셔 주 콩코드의 단독주택에서 시작한 세인트폴은 그 전에 있었던 영국식 기숙학교와는 달리 학생들의 독립성을 제한하고 공동체의 성장을 장려하는 학교였다. 이들의 목적은 '신사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엄격한 도덕성 관리 및 보호와 유년기의 연장. 사실은 도시 빈곤과 이주민 유입이라는 위협에서 벗어나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세인트폴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개인의 고유한 특성과 역량을 점점 더 강조하게 되었는데, 이는 부유한 미국인들이 돈을 버는 방식이 변화한 이유가 적잖이 작용한다. 이전에는 자본소득이 압도적이었다면, 오늘날 미국 최고 부자들의 수입 절반 이상은 임금 소득이다. 능력주의가 발흥한 것이다. 세인트폴은 여전히 연간 학비로 4만 달러 이상을 쓸 수 있는 가정이 2/3 이상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엘리트 학교들은 오늘날 자신들의 배타성을, 재능을 기반으로 최고 중의 최고를 뽑기 위한 것으로 프레임화한다.'(77쪽) 중산층은 사라져가고 있고, 인생의 기회들은 부모의 부에 따라 상당 부분 결정되지만. 엘리트 기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소외 계층을 환영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한다(78-79쪽) 이런 능력주의 안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성공을 각고의 노력과 재능의 산물로 설명하고, 특권의식에서 나오는 성장盛裝들을 거부한다. 그러나 엘리트층은 배제나 보호주의 없이도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재생산해서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 심각하게 정형화된 불평등이 어떻게 능력주의 안에서 유지되고 은폐되는지. 특권의 이런 굉장한 속임수는 이 세상이 더 개방되어 가지만, 그럼에도 더 불평등해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직원들ㅡ 영원히 그들 아래 있을 사람들ㅡ과 친밀감을 구축하는 법을 배우면서, 학생들은 계급이라는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 상호작용하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이런 상호작용을 배우면서 엘리트들은 하층계급을 다루는 것이 불가피해질 미래를 준비하며, 이와 동시에 사회적 경계들이 가짜이거나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중략) 학생들은 그들이 목격한 사소한 불평등의 조각이거나 사회적 유동성의 부재를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개인적 서사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이해할 경우 직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유동성의 부재는 사회적 삶 전반을 지배하는 특징이 아니라 예외가 되는 것이다.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이 학교의 일원으로서 노력하는 삶을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예외 말이다.(123쪽)
학생들의 기저에 흐르는 자존감은 자기 인식을 형성한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며, 자신들에게 모든 걸 투자한 공동체의 결과물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자의 표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표식은 특권이 틀림없지만, 학생들은 그들이 이 학교에 선발된 것과 들어와서 하는 일들이 모두 자신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는 데 신경을 쓴다. 요컨대, 그 표식은 그들의 성격을 구성하는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을 아예 갖다 바쳐 놨다고 보는 게 적절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택받은 소수들 가운데 위치한 그들의 자리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따낸 것이라고 믿는다.(138-139쪽)
특권은 '위계질서에 대한 존중과 위계적 관계 내에서의 친밀감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수반한다. 이런 난관을 헤쳐 나가는 법을 배우면서, 학생들은 이 학교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의 중요성을 배우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자리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학생들은 세상을 평등의 공간으로 여기기보다 가능성의 공간으로 여기도록 배운다. 즉, 자유주의적인 틀을 채택하면서, 평등은 아니지만 '공정한 기회'는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누군가 도달하는 곳은 대부분의 경우 그 자신이 해낸 일의 결과이다.ㅡ 학생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을 통해 위계상 더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것이다(144-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