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인 행복은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버트런트 러셀의 행복의 발견 중에서
“사람의 마음 본시 고요한 것인데, 물욕 때문에 미끄러져 어지럽게 되는구나.”
―정민의 <죽비소리> 중에서,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말
<미쳐야 미친다>는 내가 읽은 정민의 세 번째 책이다. 이전에 나는 <책 읽는 소리>와 <죽비소리>를 읽었다. 한결같이 삶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책들이었다. 그 향기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이 책은 다른 책들보다 더욱 그랬다. 정민은 간서치(看書痴; 책만 읽는 바보)라 불리던 이덕무의 글과 마주치면 “잡다한 일에 치여 공연히 투덜대다가도 산란하던 마음이 화들짝 돌아온다.”, “그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러다가 어느새 그 준열한 삶 앞에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풀어져있던 자세가 저절로 가다듬어진다.”라고 말한다. 나도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러했다. 그의 글들은 나태와 안일에서 나를 깨우는 죽비소리였다.
<미쳐야 미친다>는 ‘벽(癖)에 들린 사람들’, ‘맛난 만남’, ‘일상 속의 깨달음’의 3부로 되어 있는 책이다. 각 부의 제목들을 보면 서로 상관없는 글들의 묶음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나는 이 책 속의 글들이 한결같은 마음을 지향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 글들은 정민의 오랜 마음수련의 결과물들이다. 그 마음수련의 핵심, 서로 다른 듯한 글들을 관통하고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 이 순수함은 무욕의 마음이다. 개인적인 출세와 이익을 욕심내지 않는 순수함이 미친 듯한 열정을 낳고, 맛있는 만남을 낳고, 일상의 여유(즐거움)와 깨달음을 낳는다.
1부는 벽(癖)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친구도 출세도 마다하고 오로지 꽃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김덕형, 재물도 마다하고 장황에 몰두하여, 장황(서화의 표구)을 마친 후 새롭게 태어난 작품 앞에서 하루 종일 이리 저리 보며 마음 쏟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던 방효량, 돌의 품질을 따지지 않고 돌을 깎아 벼루 만드는 일 자체를 즐겼으며, 책상 가득 벼루를 쌓아두었다가 달라고 하면 두말 없이 주던 정철조, 미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독보적인 천문학자가 되었으나 주변의 질시와 시기로 곤궁 속에서 굶어 죽어간 천재 천문학자 김영, 믿기지 않을 정도의 둔재(鈍才)였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게 책을 읽은 독서광, 그리하여 마침내 큰 시인이 된 김득신, 절대의 궁핍 속에서도 평생 책을 놓지 않아 ‘간서치(看書痴)’라 불리던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불우 속에서 제 머리를 도끼로 쳐서 깨뜨리고 날카로운 송곳으로 제 두 귀를 찌른, 절망적인 현실과 맞서던 끝에 정신착란을 일으킨 사람 서위, 몰락한 잔반(殘班)이어서 뛰어난 문장에도 불구하고 과거 시험 대필자로 귀양까지 갔던 불우한 운명의 사내 노긍 등의 이야기이다.
이들 벽(癖)이 들린 자들을 보는 저자의 시선은 무척 따뜻하다. 이들은 현실생활의 무능력자와 패배자로 부정적으로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따뜻한 것은 이들이 안티 혹은 마이너들로서 시대의 격정 앞에 온 몸을 내던져 현실 앞에 부서지면서도 결코 현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며, 무엇보다도 저자가 벽(癖) 뒤에 있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자기 확신을 보기 때문이다. 정민이 압도당하는 것은 이들의 다양한 벽(癖)과 그 벽(癖)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는 이덕무에 대한 그의 평가에서 잘 나타난다. 정민은 말한다. “그(이덕무)가 나를 압도하는 대목은 호한한 독서와 방대한 저작이 결코 아니다.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맑은 삶을 살려 애썼던 그의 올곧은 자세가 나는 무섭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알아줄 기약도 없는 막막함 속에서도 제 가는 길을 의심치 않았던 그 믿음이 나는 두렵다.” 벽에 들린 자들에게서 정민이 보는 것은 처절한 시련과 가난 속에서도 변치 않는 ‘올곧은 삶의 자세’와 ‘제 갈길 가는 자기 확신’이다.
나는 이들의 올곧은 삶의 자세와 자기 확신의 바탕을 이들의 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함은 욕심이 없는 마음이다. 이익에 골몰하지 않는 마음 즉, 영리를 목적으로 하거나 대가를 염두에 두지 않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망(忘)이란 글자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정민은 망(亡)이란 글자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잊는다(忘)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좋아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 이는 곧 자신이 하는 일에 “득실(得失)을 잊고, 영욕(榮辱)을 잊고, 사생(死生)을 잊는다.”는 뜻이다. 이 어찌 순수한 마음의 열정이 없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벽(癖)을 치(痴)로 보면 바보가 되는데 여기서 바보는 순수한 사람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란 책에서 조르바의 입을 빌려 “가장 바보 같은 놈은, 내 생각에는 바보같은 구석이 없는 놈일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벽에 들린, 이들 바보같은 사람들이 진정한 바보가 아닌 것이다.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이 진정한 바보인 것은 벽(癖), 치(痴), 광(狂)이 의미하는 순수한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열정이 없는가. 그것은 우리가 줏대없이 이익에만 골몰하기 때문이다. 정민은 말한다. “함부로 몸을 굴리고,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청춘을 탕진한다. 무엇이 좀 잘된다 싶으면 너나없이 물밀 듯 우루루 몰려갔다가, 아닌 듯 싶으면 썰물 지듯 빠져나간다. 〔……〕그 뜻은 물러터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지킴은 확고하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려 하지 않고 일확천금만 꿈꾼다. 여기에서 무슨 성취를 기약하겠는가?”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2부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 속에는 뛰어난 화가의 그림보다 그 사람을 더 중히 여겼던 허균과 화가 이정의 인간적인 만남, 난잡함에 미치지 않아 오래 시들지 않은 허균과 기생 계랑의 절제된 만남, 사제 간의 정성을 다한 권필과 송희갑, 정약용과 그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인 황상의 따뜻한 의리가 있는 만남, 홍대용과 그의 벗들의 유쾌한 음악과 해맑은 웃음이 있는 즐거운 화합의 만남, 박지원의 궁핍한 삶을 보석처럼 빛내는 깊은 정과 든든한 신뢰가 있는 만남, 귀양가서도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애틋한 만남이 있다. 이들의 만남을 저자는 ‘맛난 만남’이라고 말한다.
맛남 만남이란 어떤 만남일까. 나는 신영복 교수가 말하는 ‘인성을 고양시키는 맛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영복 교수는 그의 책 강의에서 인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논어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이 곧 인성입니다.” 인성이란 인간 관계의 산물이며, 인성이 곧 덕성이라는 말이다. 서로의 인성 즉 덕성을 고양시키는 만남 그리하여 서로의 인생을 바꾸고 서로를 변화시키는 만남이 맛난 만남이 아닐까. 이 맛난 만남을 통해 인생의 험난한 여정에 위로를 받고, 때론 삶의 즐거움을 느낀다. 무엇보다 이 맛난 만남은 각자의 자아의 경계를 허물어 서로를 변화시킨다. 서로의 인성을 고양시킨다.
하지만 이런 만남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정민은 말한다.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 계산하지 않는 마음,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마음, 만남에 대해 책임지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생 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식으로 말한다면, 길들여서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대해 책임지는 마음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만남은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한다. 누구도 만남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어린왕자가 자신의 장미에 대해 책임지려는 순수함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정민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과의 만남은 겉돌기만 하고, 저마다 꿍꿍이속을 내보이지 않아 좀체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사람과의 만남이 겉도는 것은 진정한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이는 자신이 손해볼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이익을 생각하는 순수하지 못함이 맛난 만남을 불가능하게 한다.
만남은 맛남인 것이다.
3부는 일상 속에서 느끼는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기(煙氣)를 통해 불교의 연기설을 비판하면서 마침내 연기처럼 스러지고 말 인생의 슬픔을 드러내는 이옥의 글, 연기(煙氣)를 통해서 보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서 헛것을 보지말고 똑똑히 보라고 친구에게 충고하는 박지원의 글, 그림자 놀이를 통한 깨달음과 즐거움을 담은 글, 여행에서 느낀 것을 가지고 독서론과 문장론으로 발전시킨 홍길주의 글, 허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글과 벗들과의 노님을 적은 정약용의 세 편의 글이 실려있다. 이 글들의 공통된 특징은 일상 속에서 평범한 소재로 깊이 있는 깨달음과 삶의 즐거움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들은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찰에서 나온 글들이다. “그저 주는 눈길에 사물은 결코 제 비밀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 볼 줄 아는 눈, 들을 줄 아는 귀가 없이는 나는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다.”라고 정민은 말한다. 세상에 대한 애정과 관찰은 ‘볼 줄 아는 눈’과 ‘들을 줄 아는 귀’를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애정을 가지고 사물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삶의 여유가 필요하지만, “도처에 바빠 죽겠다는 아우성뿐이다.” 왜, 바쁜 것일까. 그 해답은 허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언급한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정민은 이 글에서 “남들보다 빨리 출세해야겠다는 생각, 저것을 꼭 내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집착, 이런 저런 욕심들이 기어들어 예나 지금이나 삶의 속도는 가파르게 고조되어만 간다.”고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욕심 때문이다. 이 욕심은 경쟁을 부르고, 우리는 무한 경쟁 속에서 바쁘다. 이 욕심이 삶의 여유를 빼앗아가고, 삶의 여유 속에서 맛볼 수 있을 행복을 빼앗아간다. 행복은 경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다. 삶의 여유를 가지고 세상과 사물을 애정을 가지고 깊이 관찰하면 그 속에 생활의 기쁨이 있다. 행복이 있다.
국화꽃 그림자를 사랑하여 매일 밤 이를 위해 방의 벽면을 치우고 등잔 받침과 등장을 차려놓고 가만히 그 가운데 앉아서 혼자 즐기는 여유, 친한 벗을 불러 밤에 등잔에 비친 국화의 아름다운 그림자를 함께 즐기며, 감탄하다 벗과 함께 술 한잔에 시를 지으면서 즐기는 여유 속에 행복이 있는 것이다. 홍길주의 말처럼 세상은 ‘아주 같다고 해도 안 되고, 다르다고 해도 또한 안 된다(謂之純同不可, 謂之不同亦不可).’ 겉보기엔 같지만 그 속엔 분명 다름이 있는데, 그 다름을 볼 줄 모르는 사람, 여유가 없는 사람, 욕심이 많은 사람은 삶이 지겹다고 한다. 국화꽃의 그림자에도 행복이 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바라보면 천지만물 어느 것 하나 훌륭한 문장 아닌 것이 없고, 기막힌 책 아닌 것이 없다.”는 홍길주의 말처럼, 여유를 가지고 정신을 차려서 보면 세상은 늘 새롭다.
삶의 여유를 지니기 위해서, 일상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많은 재물이나 명예가 아니다. 순수한 마음이면 족하다. 정민은 “도가의 내단수련이란, 결국 마음을 텅 비워 욕념을 걷어내고 거울처럼 투명하게 되어, 거기에 온갖 사물을 깃들여, 내가 세계가 되고 세계가 내가 되는 조화를 추구하는 마음 수련의 환유”라고 말한다. 거울처럼 투명한 순수한 마음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세상은 아주 같다고 해도 안 되고, 다르다고 해도 또한 안 되는 것이다.
정민의 책 미쳐야 미친다를 읽으며 욕심으로 가득차 있던 마음이 화들짝 놀란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며 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생활의 숨결’을 고른다. 결국 행복이란 재산도 명예도 아니다. 행복은 자신의 일에 대한 정열, 좋은 사람들과 맛난 만남, 생활의 여유 속에 있는 것이다. 행복은 물욕 때문에 어지러워지지 않은 순수한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죽비가 되어 나의 의식을 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