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님은 내가 건네주었던 등잔을 놓고 의자에 앉았다. 등잔불은 아래에서 호르헤의 얼굴을 비추었다. 호르헤 노인은자기 앞에 놓인 서책을 집어 사부님에게 건네주었다. 낯익은표지였다. 내가 시약소에서 펼쳐 보고는 아랍어로 씌어진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서책이었다..
「윌리엄 형제, 천천히 책장을 넘기면서 읽도록 하세요. 그대가 이겼어요. 그대에게는 상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사부님은, 덥석 서책을 잡는 대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법의 자락에 손을 넣어 장갑 한 켤레를 꺼냈다. 필사사(筆寫士)들이 쓰는, 손가락 부분이 없는 장갑이 아니라, 죽은 세베리노의 손에서 벗겨낸, 손가락이 온전한 장갑이었다. 나도가까이 다가가 그 서책을 내려다보았다. 호르헤 노인은 예의그 예사롭지 않은 청력으로 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감청하고소리쳤다.
「오, 너도 와 있었구나! 나중에 너에게도 그것을 보여주마」- P854
857「계속해서 읽어 보아요. 이제 그 서책은 그대의 것이니까.
그대가 번 것이지요.」그러자 사부님은 태평스럽게 웃으면서 노인을 놀려 주었다.
「호르헤 수도사, 아까 날 보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더니.
당신, 당신 거짓말을 한 모양이구려.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시방 장갑을 끼고 있소이다. 장갑 때문에 손가락이 어둔해서 당신 주문대로 책장을 빨리 넘길 수가 없는것이지요. 마땅히 맨손으로, 그것도 이따금씩 마른 손가락을혀끝에 대어 가면서 읽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오. 오늘 아침우연히 문서 사자실에서 손가락에다 침을 칠해 가면서 책을읽다가 당신의 수법을 알아낸 겁니다. 손에다 침을 묻히면서, 독이 혀끝을 통해 입 안으로 충분하게 좀 들어가게 읽어야 하는데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독은 무슨 독이냐고시치밀 한번 떼어 보시지 그러시오? 나는 지금 당신이 옛날에 세베리노의 실험실에서 훔쳐 낸 독을 말하고 있는 것이오. - P857
『시학』 제2권의 윤곽이 잡혀 옵디다. 굳이 읽었다면 나 역시당신의 의도대로 죽었겠지만 나는 읽지 않고도 내용을 말할수 있는 사람이지요. <코메디>, 즉 <희극>이라는 말은 <코마이>, 즉 <시골 마을>이라는 말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희극이라는 것은 시골 마을에서 식사나 잔치 뒤에 벌어지는 홍겨운 여흥극인 것이지요. 희극이란 유명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천하고 어리석으나 사악하지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희극은 보통 사람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왜곡시켜 보여 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효과를 연출하지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교육적 가치가 있는, 선을 지향하는 힘으로 봅니다. 거짓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실상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런데희극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을 보여 주는데도 불구하고 기지 넘치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하던 비유를 통해 실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검증하게 하고, <아하,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만든다는것이지요. 말하자면 실재보다 못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던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 준 서사시보다. 비극보다 더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P863
「그래서 책장에다 독을 발랐군요. 어둠 속에서 그런 일을하자니 얼마나 어려웠겠소?
「내 손은 그대의 눈보다 낫소이다. 세베리노에게 솔 같은걸 가져 오게 했지요. 물론 장갑도 끼었고…… 그대는 오랜좌절과 고구 끝에야 장갑을 낄 수 있었겠지만「그래요. 나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걸 상상했지요. 가령 독을 칠한 바늘 같은 것을...... 당신이 쓴 방법이 대단히 영리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고 침입자는 십중팔구 혼자 있을 때,
혼자서 도둑질이라고 하는 듯이 서책을 읽다가 중독되었을테니까.......
나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두 분이 오로지 상대의 갈채를 받기 위해서 싸워 온것인 양 서로 상대에게 감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렝가리오가 아델모를 유혹하는 데 쓴 수법, 나의 감정과 욕망을유발시키기 위해 여자가 보인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은,사부님과 호르헤 노인이 겨루어 온 두뇌와 재주,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교묘한 언변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치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레 동안 두 사람은교묘한 약속 아래, 서로 두려워하고 서로 증오하면서 은밀히서로를 찬양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P864
「그래! 잘 들어 둬. 당신은 속았어.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이런 게 바로 악마야! 악마는 그가 가고 있는 곳을 알고 있고, 움직이면서 언젠가 그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음험하지. 악마는 교활해! 무슨 까닭으로? 당신이 어디에 이를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야. 따라서 영감이 바로 악마야! 봐라. 영감은 악마답게 이렇게 어둠 속에서 살고 있지 않아! 영감이 나를 설득하려 했다면 그건 실패로 끝났어. 영감, 나는당신이 싫어. 당신 같은 인간이 싫어. 가능하다면 영감을 아래층으로 굴렸다가 마당으로 끌고 나가 옷을 홀랑 벗기고,똥구멍에는 깃털을 꽂고 면상에는 물감을 칠하여 요술쟁이나 어릿광대로 만들어 놓고 싶어! 그러면 수도원 전체가 영감을 보고 깔깔거릴 테지. 그러면 이 어린것들이 더 이상 영감을 겁내지 않을 테지. 그래, 영감의 몸에다 꿀을 잔뜩 바르고, 깃털 위로 굴린 다음 가죽끈을 목에다 감아 끌고 저잣거리로 나가 이렇게 외치고 싶군.
<이 영감이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한다. 진리라는 것이 죽을 맛이라고 하고 있으니 여러분은 영감의 말을 믿을 것이아니라 꼴을 믿으시라>
영감, 내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하거니와,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은혜의 폭포를 영감에게 허락하시고도 한 가지를 더 허락하셨어. 그게 뭔고 하니, 세상에 대한 영감의 그 거지같은상상력이야. 이 세상의 그 잘난 체하는 진리의 해석자란, 오래 전에 배운 말이나 깍깍거리는 얼빠진 까마귀와 다를 바없어!」- P873
「우리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장서관이었다. 아, 그런데 이게 무엇이냐. 가짜 그리스도 올 날이 임박했다. 이제는 학문이 가짜 그리스도를 저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오늘 우리는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가짜 그리스도라고 하시면 .....「호르헤 영감의 얼굴 말이다.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는 그 사자(使者)가 그랬듯이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 P896
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P897
그렇다면 사부님, 가능성에만 매달려서야 필연적인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과, 태초의 혼돈 사이에 무엇이 다릅니까? 하느님의 절대적 전능성과 그선택의 절대적 자유를 긍정하는 것은 곧 하느님이 존재하지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지 않을는지요?」사부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네 질문에 그렇다고 해버린다면, 식자들이 어떻게 배운것을 풀어 먹겠느냐?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반문했다.
「진리의 기준이 없으면 전달 가능한 학문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면 상대가 그 의견을 승인하지 않으면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는 뜻인지요?」그 순간 숙사의 지붕 일부가 내려앉으면서 엄청난 양의 불꽃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경내를 떠돌아다니던 양과 염소무리가 애처롭게 울며 우리 옆을 지나갔다. 불목하니 떼거리가 부딪쳐 쓰러뜨릴 듯이 우리를 지나치면서 뭐라고 고함을질렀다.
사부님이 탄식했다.
「이곳은 너무 시끄럽구나. <이런 난장판에는, 이런 난장판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아Non in commotione, non in commo-tione Dominus>.......」- P900
문서 사자실이 추워 손이 곱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stat rosa pristinanomine, nomina nuda tenemus.>- P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