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최초의 갈등이었던 한국전쟁은 미래에 있을 전쟁을, 특히 브루스커밍스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의 "훌륭한 반공 관리자로서의역량"을 시험하는 현장 역할을 했다. 베트남은 이미 1950년대부터 거론되고 있었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 개발된전쟁 기술들은 나중에 베트남과 이라크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출발대이자, 이미 일본 식민 지배자들이 개시한 것을 지속하는 연장선이었다. 가령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의 연합국들이 주도한 전범 재판에서 일본은 다수의 위안부 여성을 비롯한한인 강제징용자들의 몸을 대상으로 생물학 전쟁과 고문 기술을 시험한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셸든 해리스SheldonHanis에 따르면 일본은 이 기술을 미군과 공유하는 조건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은 이후 이 기술들을 한국전쟁 기간동안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다시 적용했다.
한국전쟁은 다른 여러 전쟁들과 유사한 점이 많긴 하지만,
이를 다룬 대부분의 학술적 성과들은 이 전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일지 모르는 것을 소홀히 다뤄왔다. 그것은 바로 파괴의 규모와 강도가 여러 가지 면에서 20세기의 다른 어떤전쟁보다 더 참혹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훨씬 많은 목숨을 앗아가긴 했지만 부수적인 피해의 비중은 한국전쟁이 더 컸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 사망자가 40퍼센트였던 데 비해 한국전쟁에서는 사망자의 70퍼센트가 민간인 사망자라는 추정도 있다. 베트남전쟁은 비무장 민간인을 겨냥하여 야만적인 전술을 수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한국전쟁에서도 동일한 전술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행되었고, 그로 인해 훨씬 단기간 동안 더 많은 사망자를 집약적으로 발생시켰다. 사르콘웨이-란츠Sahr Conway Lanz는 이렇게 말한다.
베트남전쟁에 관한 글을 쓸 때와는 달리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의 비용을 대체로 간과해왔다. 그들은 한국전쟁의 만행에, 그것이 야기한 참상에, 그 갈등이 한국인들에게는 절대 제한된 전쟁이 아니었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대부분의 전쟁 사학자들은 역사를 서술하면서 항공기에 의한 파괴, 대규모 민간인 사상자와 난민, 미국 참전 군인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피해, 그리고 게릴라전으로 인해 UN군에게 대두된 문제들을 각주로 남겨두었다.- P103
아니어도 최소한 연루되어 있었다. 커밍스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게 아니었다. 많은 특별 진술과 주장이 그와 반대임을 보여준다. 만일 전쟁이 그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김일성 또한 그때 ‘전쟁을 개시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그 시점을 반추해서 살펴보면 내전은 시작되는 게 아니라 다가온다는 진실을 서서히 더듬더듬 깨닫게 된다. 내전은 주변 모든 사람의 탓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그비난의 대상 중에는 한국을 생각없이 분단시켜 놓고 나서 식민지적인 정부 기구를 다시 수립한 미국인들과 거기에 공조한 한국인들도 충분히 포함된다.
커밍스는 여기서 사실상 미국의 개입으로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1945년 9월 8일 이전에 시작된 자생적인 독립운동 세력이 무력화되고, 일본에 협력한 한국 관료들이 처벌은커녕 외려 보상을 받고, 한반도가 소련과의 권력 투쟁을 위한 경기장으로 탈바꿈하여 무장한 저항군이 세를 키울 맹아가 형성되었다는점에서 한국전쟁으로 비화한 ‘내전‘은 미군의 개입으로 악화되었음을 암시한다. 전쟁사학에서는 다양한 사항을 놓고 논란을 벌여왔지만 그 와중에도 문화적 트라우마가 한반도의 거의 전 인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있어서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 P110
두 나라의 협력이라는 이런 줄거리는 미국을 늘지배적인 남성-한국군에게는 형, 국제결혼의 로맨스에서는남편, 그리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는 아버지ㅡ으로 그리는 가족 관계 비유에 의지한다. 한국전쟁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베트남전쟁과 닮았지만, 베트남전쟁이 미군의 실패한 남성성의 사례였다면 성공적인 구출 작전이라는 한국에 관한 서사는국가들로 이루어진 가부장적 가족 내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회복시킨다. 필라델피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통일 운동가 박성용의 말을 빌리면 "미국인들은 전쟁에서 미군이 용맹함을 뽐낸 이야기를 듣는 데 익숙하다.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이 미군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전 가운데 하나였다는 신화를, 잔혹 행위는 자국 군대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의해 자행되었다는 신화를 믿는다. 이 신화는 미군이 진실을 감추거나 위장함으로써 탄생한 것이다."- P115
<민간인 피난민 대상 기총소사 정책>이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1950년 7월의 어떤 문서에서 터너 로저스 대령 Colonel Turner Rogers은 이렇게 우려를 표명했다.
"민간인 대상 기총소사와 관련된 우리의 작전은 과한 주목을 받을 게 분명하고 미 공군과 미국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 수있다. 공군은 민간인 사상을 방지하기 위해 신중하게 작전을 진행하는 대신 피난민 기총소사와 민간인 학살과 가옥 파괴를 이어갔다. 1950년 여름이 끝날 무렵, 워싱턴 DC의 군 홍보실로 한국 내 미국 폭격기들이 "무차별적"이라는 소문이 전해졌다. 결국 펜타곤은 한국 내 미군들에게 부정적인 보도를 피하기위해 촌락의 폭격을 더 이상 기록하지 말고 그것을 "군사적인 표적"이라고 부르라고 권고했다. 한국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바로 산업적인 표적이나 군사적인 표적이 너무 없다는 것, 이런 표적은 대부분 전투 초기 몇달만에 파괴되었다는 점이었다. 한 UN 간부가 1951년 8월 보고한 대로, "서울에서 (...) 극동에서 가장 근대적인 도시 중하나인 그곳에서, 산업 시설의 85퍼센트, 사무 공간의 75퍼센트, 생활공간의 50~60퍼센트가 파괴되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미 공군 작전 요약서는 적에게 점령당했다고 판단될 경우 마을 전체를 주기적으로 잿더미로 만들고 도시에 "포화 처치"를 가하는 "초토화 정책"을 이행해, 그로부터 종종 "탁월한 결과"를 얻었다고 보고했다.- P131
전쟁 심리학자 데이브 그로스먼Dave Grossman에 따르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목숨을 빼앗을 때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죄책감 반응을 가로막는 것은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인종적인 차이, 그리고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에대한 믿음이다. 군사적인 수사를 통해, 그리고 1950년대미국 대중문화를 통해 구축된 ‘오물gooks‘이라는 인식은 한국인이 인종적·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이므로 남측에서는 구해주고 북측에서는 말살시켜야 한다는 관념을 반영한다. 하지만 피난민들이 갈등의 경계를 넘나들며 꾸준히 이동하는 통에 북과 남은 사실상 구분이 불가능해졌다. 공산주의로부터구조되었다던 바로 그 한국인들이 미국과 UN군에 의해학살당하고 남한군과 미국군에 의해 정치수로 수감되었다. - P135
트라우마는 안정된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감각을 항시 흔들어놓는다는 점에서 기억을 소개시킨다. 기억은 위협을 당할때마다, 트라우마가 되돌아올 것 같다거나 새로운 트라우마가 일어날 것 같다는 감각이 있을 때마다 도망갈 태세를 취한다. 물론 재앙이 임박했다는 이런 감각은 망상이다. 트라우마는 절대로 완전히 도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절대 도착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일어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트라우마는 어떤 끈질긴 과거의 효과로서 현재 안에 이미깃들어 있다. 트라우마를 입은 주체는 끊임없이 뿌리 뽑힌 상태에 있다. 그는 전에도 그곳에 있어보았다는 점에서 익숙한 장소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반복의 힘을 통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장소는 원래의 장소도 최종 목적지도 아니며, 그를 실패한 기억과 불완전한 망각 사이에 붙들어둘 뿐이다. - P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