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은 낮에는 고문에 시달렸고, 밤에는 옆 사람의 신음과 울음소리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치장은 점점 수감자가 늘어나 잠잘 때 열으로 누워서 아침까지 칼잠을 자야 했고, 밥은 꽁보리밥에 노란 물감이 묻어 있는 단무지 두세 조각이 전부였다. 그중에서 도저히 참을 수없는 고통은 사실 속옷과 생리대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생리대는 한 사람에게 하루에 하나씩 제공되었고, 그 이상을 요구하면 모욕적인 언사가 따라왔다. 날마다 수사받으러 상무대로 들락날락하면서 여성들은 무지하게 맞고 돌아왔다. 얼마나 맞았는지 엉덩이 전체가 시퍼렇다 못해 까맣게 변해 있었다. 특히 항쟁 당시 방송했던 여성들은 고문으로 수시로 하혈했고, 하혈을 멈추기 위해 국군통합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신체적 고통보다 간첩 행위자로 조사받는 일이 더 두렵고 고통스럽다고 했다.- P268
피를 말리는 시간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조사가 느슨해지는것 같았다. 6월 말에 전남대 학생회 간부들이 잡혀 오거나 자수하여 수사 방향이 바뀐 것 같았다. 이른바 광주사태를 북한의 지령으로 일어난 폭동에서 김대중과 연관된 사건으로 수사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 나는 그런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박관현 학생회장 선거에 상당한 비용을 지원했고, 그 비용은 김대중이 정동년을 통해 지원한 것으로 날조되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시동생 김상집과 김현주 그리고 아내인 나와 내 동생 정현순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우리들을 볼모로 삼아 남편에 대한 고문을 강화했다. 나 역시 보강 조사를 받기 위해 상무대 영창에 자주 갔고, 가끔 맨발로 조사실에 들어가는 남편을 먼발치에서 보기도 했다. 한번은 남편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을 목격해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수사관도 나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상황이 매우 심상치 않게 전개되었고 그럴수록 초조하기만 했다. 수사관들은 "사형수가 다섯 명 정도는 돼야 한다"는 전두환의 수사 방침이있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 P269
가족들은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자료를 전달하면서, 20사단의 광주 이동에 미국이 동의한 사실, 5.18 항쟁 당시 미국인들을 광주군사공항에 피신시킨 사실 그리고 주한 미군사령관이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고 발언한 신문 기사를 보여 주며 미국의 책임을 따지자 참사가 자리를 피해 버렸다고 한다. 다만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는 주한 미국대사관에 두고 나왔다는데, 이 편지는 실제로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해진 것으로 나중에 확인되었다.
우리는 미국이 변명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고 광주학살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1년 1월말경 우리는 광주 미문화원장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우리는 미문화원장에게 강도 높게 미국의 책임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미문화원장은 지난번 만났을 때와 180도 다른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한국을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왔다"는 미국대사관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가장 연장자였던 윤이정 여사가 참고 참다가 그녀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너희들은 홍시 빨아먹듯이 우리를 빨아먹기만 한다."
1981년 5월, 우리 가족들은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다시 한 번 광주미문화원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형사들을 대기시켜 놓고,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쫓아냈다. 미국의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광주 미문화원은 분노한 운동권 학생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고, 결국 위치를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타 지역에 설치되었던 미문화원들도 이후 분노한 학생들의 공격 목표가 된다.- P288
"청와대에서 윤공희 대주교와 전두환이 전격적으로 면담을 했지만, 별 내용은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이제 광주로 내려가서 기다리는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는 고생만 합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별말씀이 없으셨고, 먼저 광주로 가시기 위해 지하성당을 나가셨다. 추기경은 우주선을 타는 사람들이 먹는다는 우주식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면서 가족들을 위로했다. 단식농성 중이라보기에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우리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형이 풀어지기 전에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사형수들의 목숨이위험한 상황에서 구속자 수배자들의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계속 농성하겠습니다."
나는 뒤쪽으로 물러나 정형달 신부와 이 답답한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신부님의 말씀으로는, 청와대 면담에서 윤공희 대주교가 사형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더니, 전두환은 이런 사건에서 사형은 불가피하다고 되풀이하며 주장했다고 한다. 전두환의 주장에 대주교는 그냥 침묵으로 일관하셨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그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도 모자라서 또 사형을 시키겠다고? 결국 폭동을 진압한 공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거겠지.‘- P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