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사대자소가 일반 상식이던 ‘중원‘을 중심으로 한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군부·신자 관계로 이념화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매우 특이하였다. 개인끼리라면 모를까, 냉혹한 국제 무대에서는 아무리 이념적으로 끈끈한 관계라 해도 시세 변화에 따른 다양한 합종연횡이 오히려 상식이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그런 변화 곧 ‘황제 갈아타기‘를 극도로 거부하였다. 심지어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명과 조선의 관계를 이념화하였다. 왜 그랬을까? 고려의 선배들은 중원의 시세에 따라 수시로 황제국을 바꿨는데, 약 250년쯤 지난 17세기 전반 조선의 후배들은 왜 그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었을까?
조선의 위정자들이 국력의 강약이나 존망보다 더 상위에 둔가치는 인륜에 기초한 의리였다. 주자학의 융성과 함께 조선에서 뿌리를 아주 깊게 내린 지존의 가치, 곧 명과 조선을 군부·신자 관계로 보는 인식이 17세기에 매우 확고하였다.
조선인의 중화 인식은 핵심이 사대事大ㅎ였다. 문자 그대로 큰나라를 섬긴다는 뜻인데, 여기서 ‘대大‘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적잖이 달랐다. 한국사에 국한해 보아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대는 대개 강대국을 의미하였다. 고려 때 황제국을 수시로 바꾸면서도 이념적 고민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중심은 중원인데, 어떤 북방 종족이 중원을 점령했다면 그것은 하늘이 그들에게 천명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현실적 해석이 얼마든지가능하였다.
그런데 주자학이 들어온 고려 말부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의미가 사뭇 달라졌다. 흔히 중화의 요건으로는 공간(중원)·종족(한인)·문화(유교) 세 가지를 보는데, 고려에서는 종족 기준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복왕조conquest dynasty의 시대였기에 한인이라는 종족을 강조하면 할수록 고려의 상황만 복잡해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화이관으로 무장한 주자학이 아직 나오지않았거나, 등장했더라도 아직은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사정이 달랐다. 조빈의 주장에도 나오듯이, 조선 태조가 천조(명)를 치러 가던 군대를 위화도에서 돌려 새 왕조를 세운 일은 존왕尊王의 실천이었다. 또한 지금 백척간두의 국가 위기에 몰린 상태임에도 척화를 부르짖는 이유는 명을 단순히 강대국으로만 간주한게 아니라 유교적 중화 문명을 담지한 천자국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곧 군사력의 강약을 초월하여 문명론 차원에서 중화를 인식한 결과였다. 조선이 망하더라도 의리라는 국시를 저버릴 수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당시 양반 지배층이 골몰한 고민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