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년(1627)에 맹약을 맺으며 조선은 원하든 원치 않든 후금과 형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조선이 아우였다. 이것은 조선 건국전부터 야인이라 부르며 멸시하던 이들의 후예를 형으로 삼은 미증유의 대사건이었다. 맹약에서 명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군부를 공격하는 이적에 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형님으로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조선의 조야가 들끓었다. 정변으로 집권한 지 4년 만에 인조 정권이 후금과 덥석 강화한 현실은 ‘반정‘의 정당성까지 뒤흔들었다. 반정의 핵심 명분은 광해군이자행한 폐모廢母 인목대비 폐위 논의)와 배명背明 행위였는데, 이제 그 양 날개 가운데 ‘배명‘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인조는 광해군보다 훨씬 더 심한 배명, 곧 패륜을 저지른 꼴이었다. 실제로도 그 후유증이 매우 컸다. "이름은 화친이지만 실은 항복입니다"라는 사간 윤황尹煌(1571~1639)의 직설은 그 좋은 예이다. 항복이라는 말에 발끈한 인조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윤황을 극구 두둔한 대간과 신료들의 외침은 후금과 맺은 맹약(화친)의 후폭풍이 엄청났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분위기가 병자호란 때까지 내내 이어졌다.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척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