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드라마 보면 난 늘 이상하고 궁금한 게 있었어요.
희주가 맥주잔을 든 채 잠시 회상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뭐요?
-파자마-파자마 잠옷?
-응. 드라마 속 주인공이 집에서 늘 그렇게 입고 있는 게.
그런 옷이 따로 있는 게 생경하고 이상했어요.
-어? 나도 그런 거 있는데.
-뭐요?
-간식.
-아.....
-영화나 드라마에서 내 또래 아이가 혼자 쓰는 방이랑 그안으로 엄마가 쟁반에 받쳐 갖다주던 간식. 나는 그게 늘 신기하고 낯설었었어요.
-맞아. 근데 걔는 꼭 엄마한테 나가라고 소리치고.
-맞아. 진짜 그랬어.
두 사람은 맞장구를 치며 함께 웃었다. 과한 자기 연민이나엄살이 없는, 깨끗함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그리하여 어느봄, 회식 멤버가 다 떠난 새벽, 해장국집에서 단둘이 3차를 하고 긴 가로수 아래로 도시의 2급수가 흐르는 천변을 걷다. 두사람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아래서 고전적으로 입맞췄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적절함‘의 거리를 둘이 힘을 합쳐 구겨버렸다. 스무 살의 다급함이나 허둥거림 없이, 과도한 기대나 실망도 없이 서로의 느낌에 집중하면서. 그러고 한참 뒤 입술을 떼었을 때, 기태가 갑자기 벚나무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기태씨, 왜 그래요?
희주의 다급한 목소리에 기태는 문득 발길질을 멈췄다. 그러곤 술에 취해 발그레해진 얼굴로 희주를 빤히 바라보다 누가 들어도 너무 순진하고 무모해 낯뜨거워지는 말을 했다.
-자기 꽃비 맞으라고요.- P151
사다리 마지막 칸에 기적적으로 오른 자신과 달리 ‘요즘‘ 입사한 친구들은 어느 정도 한국의 정교한 계급 필터를 거친 이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자신이 쥐고 태어난 걸 과소평가하는 것 같았다. 계급성은 지우고 나이라는 약자성만 내세운 채 신문에서 읽은 말로 앞 세대에게 자주 적의를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뭘 굳이 읽지 않고도 언제든 쉽게 품을 수 있는 게 적의이기도 했다. 기태는 대학 졸업 후 어렵게 은행에 들어온 뒤 세상에는 돈 많은사람이 참 많다는 걸 실감하곤 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기태의 ‘고객‘뿐 아니라 동기나 후배도 여럿 있었다.
-당신들이 첫 세대가 아니라 ‘부모보다 못살거나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은 늘 있었어요. 지금도 있고.
후배들 앞에서 언제나 ‘좋은 선배‘이길 자처하는 박과장이과장되게 웃었다.
-에이, 비율이 다르잖아, 비율이 비용도 다르고.
-그러니까 ‘우리‘ 말고, ‘세대‘ 말고, 내 얘길 하자고, 내얘기를.- P159
그날 집으로 돌아가며 기태는 ‘아! 앞으로 나는 부하 직원들에게 존중받는 은따, 대우받는 꼰대가 되겠구나‘ 자책했다. 그렇지만 그날 기태를 괴롭힌 건 자신이 실언했단 사실이 아니었다. 기태가 진정 후회하는 건 그 순간 자신이 굳이 ‘진심‘을말했다는 거였다. 그날 기태는 이혼한 이래 처음으로 희주가그리웠다. SNS에 가입해 처음으로 희주의 계정을 찾아본 날도 그날이었다.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부정과 경멸의 대상이 된 것 같았던 날. 이제 자신이 빼도 박도 못하는 기성세대가 됐음을 자명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밤 말이다.- P160
사실 정신을 단속하는 일이라면 조금 자신 있었다. 나이들어도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주변에 크게 폐 끼치는 존재는 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실제로 기태의 젊은 시절 꿈은 훌륭한 어른은 못 돼도 산뜻한 중년은 되는 거였다. 청결한 옷을 입고, 타인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젊은 세대를 지지하고, 주변에 해가 되지 않는 존재가되는 것. 긴 시간이 지나 기태가 진심으로 놀란 건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태는 자신을 둘러싼 좌표는 그대로되 ‘나‘라는 점만 이동하리라 착각했었다. 점과 더불어 좌표도 같이 움직이는데다 다른 그래프와 충돌하며 곡선과 직선이 찌그러지고 휠 거라 예상 못한 까닭이었다. 물론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여기저기 빵가루처럼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닌 말과 마음들, 담백하지 못한 처신들.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낸 뒤 엄습한 부끄러움같은 건 이제 많이 줄었으니까. 경험이 많다는 건 ‘경험을 해석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냄새는 헛구역질이나 트림은 ‘해석‘이나 ‘의지‘로 잘 막아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거였다.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게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P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