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8 함께 만든 대장경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뛰어난 가치를 지녔지. 하지만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만 만든 것은 결코 아니야. 그리고 우리나라의 불교에만 영향을 끼친 문화유산도 결코 아니고 말이야.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
세계 최초의 대장경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야. 부처가 태어난 인도에서 탄생했지.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건 한나라 때의 일이야. 그리고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단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때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거 알고 있지?
불교에도 기독교의 《성경》처럼 경전이 있어. 부처의 가르침을 적어 놓은 경전을 불교 경전, 즉 불경이라고 부른단다. 처음에는 부처의 가르침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어. 하지만 입으로만 전하면 내용이 사라질 수도 있고 바뀔 수도 있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가르침을 글로 옮겨 적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일일이 옮겨 적으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 그래서 목판에 새긴 후 종이에 찍어 인쇄를 하기 시작했지. 물론 목판을 새기는 건 글로 적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을 거야. 하지만 한 번 새겨 놓으면 원하는 대로 찍을 수 있기 때문에 불교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지.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은 오로지 경판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지.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이런 건물을 '장경각'이라고도 해.
중국은 목판 인쇄술을 가장 먼저 개발한 나라야. 목판 인쇄술 발달에 기여한 건 불교 승려들이었어. 당나라의 승려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목판에 새기고, 인쇄를 해서 다양한 불경을 만들었어. 그러니 자연스럽게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게 되었지.
불경의 인쇄가 늘어난 건 송나라 때의 일이야. 송나라 승려들은 전국에 있는 불경들을 모두 모아, 마치 백과사전을 만들듯 순서를 정해서 하나로 묶었어. 그리고 수많은 목판에 경전의 내용을 전부 새겼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대장경이란다. 세계 최초의 대장경이었지. 송나라 사람들은 이 대장경을 ‘개보대장경’이라고 했어.
고려가 처음 만든 대장경
《팔만대장경》의 원래 이름은 《재조대장경》이야. ‘다시 만든 대장경’이라는 뜻이지. 그런데 전체 경판의 수가 8만 장이 넘기 때문에 흔히들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거란다. 몽골군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아 내기 위해 만든 거라고 하는데, 만드는 데 16년이나 걸렸고, 8만 장이 넘는 목판에 모두 5200만 자 정도가 새겨졌다는구나.
그런데 《팔만대장경》이 ‘다시 만든 대장경’이라면, 그보다 앞서 만든 대장경도 있냐고? 맞아, 고려 시대 사람들은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전에 《초조대장경》을 만든 적이 있단다. ‘처음 새긴 대장경’이라는 뜻인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몽골군이 침략했을 때 불에 타서 사라지고 말았거든.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만든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었어.
《초조대장경》은 1011년에 시작해서 70년이 넘게 걸려 만든 대장경이야. 만들기 시작한 날로 따지면 《팔만대장경》보다 200년도 더 앞서 만든 셈이지. 《초조대장경》을 만든 건 거란족 요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서였어.
《초조대장경》은 고려 사람들이 직접 불교 경전들을 모으고 순서를 정해서 새긴 것이 아니야. 앞에서 이야기한 송나라 《개보대장경》의 인쇄본을 수입해서 그걸 바탕으로 삼아 만들었지. 이 얘기에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어. 《초조대장경》 제작 과정에서 《개보대장경》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완성도를 높였으니까 말이야. 이렇게 해서 《초조대장경》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이 되었단다.
하지만 《초조대장경》은 100여 년이 흐른 후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불에 타서 사라지고 말아. 그래서 고려 승려들은 대장경을 다시 만들기로 했어.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재조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이란다.
대장경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초조대장경》은 몽골군에게 불에 타서 사라졌다고 했지? 그런데 1965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어느 한국의 학자가 일본에 있는 책들을 조사하다가 일본 교토의 ‘난젠지’라는 절에서 《초조대장경》을 발견한 거야. 물론 이미 불에 타버린 목판을 발견한 건 아니고, 인쇄한 종이 두루마리를 발견한 거였어.
발견된 인쇄본은 전체 《초조대장경》 6000권 중에 1800권 정도였지. 그리고 얼마 후 일본 쓰시마에서 600권 정도를 더 찾아냈단다. 이후 한국에서도 《초조대장경》 인쇄본을 300권이나 찾아낼 수 있었어.
일본에 남아 있는 《초조대장경》 인쇄본은 경판이 불에 타기 전에 고려 사람들이 찍어둔 것 중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겠지. 그럼, 일본은 왜 고려의 초조대장경을 가져간 걸까?
당시 일본은 고려 못지않게 불교가 발전한 나라였어. 하지만 송나라나 고려와 달리, 당시 일본은 대장경판을 새길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어. 그래서 일본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초조대장경》 인쇄본을 받아왔던 거야. 그 인쇄본이 교토의 난젠지와 쓰시마에 남게 된 거고.
대장경을 모으는 일본의 열정은 고려 시대가 끝나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식을 줄 몰랐어. 일본은 예전에 고려에 요청한 것처럼, 조선에도 대장경 인쇄본을 요청했어. 이번에는 《초조대장경》이 불탄 후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을 요청했지.

《팔만대장경》은 1488년 즈음에 완성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어.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뛰어난 보존 기능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아
《팔만대장경》보다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도 했지.
《팔만대장경》은 조선보다 일본에서 더 귀한 대접을 받았어. 일본 승려들이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서는 불경을 백과사전처럼 모두 모아 놓은 대장경이 꼭 필요했거든. 일본 사람들이 《팔만대장경》을 얼마나 갖고 싶어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조선 세종 임금 때의 일이야. 일본에서 사신이 왔는데, 늘 그랬듯이 《팔만대장경》을 요구했어. 그런데 이번에 그들이 요구한 것은 인쇄본이 아닌 《팔만대장경》의 경판이었어.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했다고 했었지? 아무리 그래도 나라의 문화재를 함부로 줄 수는 없는 거잖아? 조선에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자, 일본 사신은 단식 투쟁까지 벌였단다.
“저희가 조선에 온 것은 오직 대장경판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선으로 떠나오기 전, ‘대장경판 없이는 절대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차라리 여기에서 굶어 죽겠습니다.”
결국 세종 임금이 세 번이나 말려서 겨우 단식을 멈추게 했다는구나.
조선에서 건너간 《팔만대장경》 인쇄본은 일본 승려들의 손에 전해졌어. 《팔만대장경》을 본 어떤 일본 승려는 이런 말을 남겼대.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완전한 책이다.”
일본은 《팔만대장경》을 어떻게 했을까?
《팔만대장경》은 일본 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어. 일본 승려들은 《팔만대장경》 인쇄본을 일본 곳곳의 절에 대대로 잘 보관하고 열심히 연구했어. 그래서 《팔만대장경》의 우수성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데에 크게 기여했단다.
고려 사람들의 뛰어난 기술로 만든 대장경에 세 나라 문화 교류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은 중국 송나라의 《개보대장경》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어. 또한 《팔만대장경》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일본 승려들의 노력도 한몫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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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 : 한나라가 멸망한 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의 시대. 여러 나라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멸망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으나 문화적으로는 크게 발전했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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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퀴즈★
고려에서 《초조대장경》 다음으로 만든 대장경으로 몽골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 글씨가 새겨진 경판의 수가 8만 장이 넘는다 하여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데, 두 번째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로 불렸던 다른 이름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