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 마치셨나요? 주문마치셨어요?" 패러것은 간이침대에 누운 채 다가을 아침과 그에게 닥칠지도 모를 죽음을 떠올리면서, 갇힌 자에 비하면 죽은 자에게 이점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죽은 자에게는 최소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추억과 후회가 있을 것이다. 반면 지금처럼 갇혀 있는 그에게는 풀냄새나 구두 가죽 냄새 혹은 샤워기 파이프에서 나오는 물냄새를 맡을 때에만 간헐적으로 옛 기억이 떠오를뿐, 밝게 빛나는 저세상에 대한 추억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추억이라고 할 만한 일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갈수록 희미해지면서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을 맞을 때마다 현실을 버티게 해줄 한마디 말이나상징, 촉감 또는 냄새를 기대하며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으나 그때마다메타돈 아니면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몸만 발견할 뿐이었다. 감옥에 있는 그는 마치 여행자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그는 극심한 소외감이 그리낯설지 않을 만큼 과거에 이미 낯선 나라들을 충분히 돌아다닌 터였다.
낯설음이란 새벽녘 여행지에서 잠을 깰 때마다, 방금 꿨던 꿈부터 시작해 모든 것들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곳에서는 낯선 언어로 꿈을 꿨고 낯선 침대보의 촉감과 냄새를 느끼며 눈을 떴다. 창문으로는 낯선 연료의 낯선 냄새가 기어들어왔다. 녹물로 하는 목욕은 낯설었고, 거칠고 낯선 화장지로 항문을 닦았으며, 낯선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 낯설고 역겨운 아침식사가 그를 기다렸다. 그게 여행이었다. 감옥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가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또 꿈꾸었던 모든것들이 잔인할 정도로 낯설었다. 그러나 그가 남은 생애를 전부 보내게될지도 모를 이 대륙 혹은 이 나라에는 그 어떤 국기도 국가도, 군주도, 대통령도, 세금도, 경계선도, 무덤도 존재하지 않았다.- P62
창가에는 아직도 약간의 햇빛이 남아 있었다. 랜섬의 라디오에서는댄스 음악이 흘러나왔고 복도 끝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는 곤란한 지경에 빠진 사람들이 화면에 등장했다. 과거에 취해 헤어나지 못하는 노인, 미래를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는 청년, 연인들과 갈등을 겪는 젊은여자 그리고 술병들을 모자 상자와 냉장고와 책상 서랍에 숨기는 노파.패러것은 화면 속에 보이는 그들의 머리와 어깨 너머로 마을 전경과푸른 숲 그리고 하얀 해변으로 몰려와 부딪는 파도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산책 삼아 가게에 가거나 숲으로 소풍을 가거나 바다로헤엄치러 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언쟁을 벌이며 한방에 틀어박혀 있는 걸까? 그 모든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데 왜 실내에만 머물러 있을까? 왜 패러것처럼 그들을 부르는 파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것일까? 왜 패러것처럼 그 파도 소리에 아름다운 조약돌을 넓게 펼쳐놓은 채 부서지는 깨끗한 바닷물을 상상하지 못하는 걸까? - 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