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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이엉덩이님의 서재
  •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 이운진
  • 8,100원 (10%450)
  • 2015-08-17
  • : 392

슬픈 환생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 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가만히 꼬리뼈를 만져 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 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으나
내 개의 꼬리는 어떡할까 생각한다.- P13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타로카드 한장을 뒤집었을 때
무표정한 점술사는 내게
슬픔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와 같다고
영원히 나의 바위를 향해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계절이
동쪽에서 왔다가 서쪽으로 가고
새들이 남쪽과 북쪽으로 집을 옮겨 다녀도
바위는 나의 운명보다 강할 거라고,

그때 나는
별조차 아무런 이유 없이 떨어지는 곳
내가 불시착한 이생에서
슬픔의 대문자로 이름을 썼다

슬픔은 마음에서만큼이나 가슴에서
몸에서만큼이나 삶에서
나를 베는 연장이 되어

구르는 바위와 나 사이
무엇을 세워도 슬픔을 이기는 튼튼한 벽이 되지 않았다

웃고 그리워하고 싶은 보잘것없는 저녁과
내가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던 하루를
내게서 영원히 가져간 건 누구인지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바위에게로
돌아가고 돌아가고 또 돌아가게 하는 건 무엇인지

눈물 하나하나가 바위처럼 굴러 떨어지는 밤

신의 유머 같은 내 운명의 타로 카드에
나는 슬픔을 섞지 않은 빛깔로 몆 번이고 덧칠을 했다.- P23
아름다운 복수

신도 자신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는 말,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그의 지옥이라는 말,


올해의 마지막 벚꽃이 지는 나무 아래서 생각한다
이 봄과 이 나무 사이만큼의 밀어도 없이
꽃잎처럼 훨훨 날려 본
가벼운 웃음도 없이
봄을 보내는 하루
뼈를 겉으로 입은 듯
부끄럽고 아픈 하루를 보내는 봄날
서럽고 사무쳐
꽃잎을 줍다가 생각한다
내년에도 신은 또
봄의 모래시계를 다시 거꾸로 세워 줄 것이다
새 벚꽃은 피고
지고
나는 똑같은 봄을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흘러내리겠지만
그다음 해에도 신은 또,
- P49
모두 옛말

부처의 제자 중 한 사람은 마당을 비질하는 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는데,

봄에는 꽃잎을 쓸고
여름에는 빗물을 쓸고
가을에는 낙엽을 쓸고
겨울에는 눈을 쓸어 낸다

꽃잎은 봄의 쓰레기
빗물은 여름의 쓰레기
낙엽은 가을의
흰 눈은 겨울의 쓰레기

일년 내내 아파트 단지를 쓰는 경비 아저씨는
빗자루처럼 기대 쉴 낡은 벽이 없다
깨달음은 모두 옛말,- P97
욕을 먹다

사람들은 쉽게 욕을 한다
짐승 같은 놈
짐승만도 못한 놈, 이라고

그 순간 초원의 한복판
사자와 가젤이 달려간다
가젤 한 마리를 뒤쫓는 사자와 사자로부터 도망가가젤이
몇 번째인지 모를 생을 헤아리며 달린다
사자나 가젤이나
먼먼 조상을 원망하지 않고
신이 편들지 않는 게임에서
서로의 운명을 팽팽히 당기며
짐승의 삶을 지킨다

빌딩 숲에서 나는 달린다
사자가 결코 부러워하지 않을
행복을 얻기 위해 발톱을 세우고
가젤보다 위험하게
사자보다 숨차게 검은 밤을 헤맨다
사람 같은 놈, 이라고
사자에게 욕먹는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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