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뒤를 쫒아서 결국 리스본에 오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P32
우리둘 모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존경하지요. 그의 명상록 가운데 한 부분을 기억하실 겁니다. "내 영혼아, 죄를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P51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아름다운 무음(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P65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꿈과 같이 격정적인-갈망....... 다시 한 번 손에 모자를 쥐고 따뜻한 이끼 위에 앉아 있고 싶은 것,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하는 것, 이는 모순되는 갈망이 아닌가.- P224
‘이름이 뭐지?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가다른 사람들에게 입히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 P253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범속함에 맞설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필요하니까. 반짝이는 교회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그 천상의 색에 눈이 부시고 싶다. 더러운 제복의 단조로운 색깔에 맞설 광채가 필요하니까. 교회의 혹독한 냉기로 내 몸을 감싸고 싶다. 병영의 단조로운 고함 소리와 들러리 정치인의재기 넘치는 수다에 맞설, 명령을 내리는 듯한 그 정적이필요하니까. 행진곡의 새된 천박함에 대항할 물 흐르는 듯한 오르간의 울림이, 흘러넘치는 그 숭고한 음색이 듣고싶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하니까. 난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읽고 싶다. 언어의 황폐함과 구호의 독재에 맞설, 그 시(詩)가 지닌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싶지 않다.- P263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 모든 것을안다는 신이 왜 이것은 모르는가? 견딜 수 없는 단조로움을 의미하는 무한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P263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이지.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삶이 완전하지 못할 거라고 미리 생각만 해도 이마에 땀이 솟는다. 완전한 삶. 그건 과연 뭘까? 단편적이고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변하기 쉬운 우리 인생을 생각해볼 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완전한 삶을 구성하는 건 과연 무엇인가?
조르지를 괴롭힌 것은 반짝이는 스타인웨이 앞에 앉아스스로 작곡이라도 한 듯 바흐의 음악을 제 것으로 만들수 없다는, 성취할 수 없음에 대한 고통이었나? 아니면 우리 인생이 완전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경험을 충분하게 하고픈 욕구였나?
결국은 자화상의 문제인가? 동의할 수 있는 인생이 되- P325
려면 경험하고 이루어야 한다고 오래전에 생각해두었던결정적인 상상? 그렇다면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생기는죽음에 대한 공포는 완전히 내 손에 있는 듯이 보인다. 내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충족되어야 한다는 상(像)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이므로, 생각보다 더 가까운 것이 어디있으랴? 지금 내 삶이 이미 상에 상응하도록 생각을 바꾸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도 여전히공포가 남아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스스로 상을 만들긴 했지만, 그 상이 변덕스러운 기분에서 나왔다거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나를 나로 만드는 감각과 사유의 놀이에서 자라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P326
_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을, 없으면 우리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숨을 지으며 할 수 없이 견뎌야하는 그 무엇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P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