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좀 자극적이네.”
내가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를 읽고 있는 것을 보던 친구가 제목을 힐끗 보더니 한 말이었다. 별 생각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둔다’라는 말의 부정성 때문일까. 확실히 일본에서는 왕따, 소위 ‘이지메’라 불리는 것이 굉장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왕따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지기도 했었고.
하지만 이 책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글쎄, 단순히 왕따 문제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 책이 재미있었던 동시에 좋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단 한 명의 내면에 집중하여 주변을 둘러보지 않지 않았다는 것. 같은 사건이, 같은 상황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는 것. 겉으로는 ‘위’에 속하고 ‘아래’에 속하는 걸로 쉬이 나누어지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은 결코 그것으로 다가 아니라는 것. 영화부 료야가 위쪽의 학생들을 동경하듯, 야구부 히로키는 아래쪽, 료야의 열정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늘 기리시마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후스케 또한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잘 나가는 학생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런 작지만 섬세하고 소소한 순간을 담았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제목에 ‘기리시마’라는 이름이 떡 하니 붙어있는 만큼, 이 책의 주인공은 기리시마가 아닐까 지레짐작했던 나였다. 하지만 기리시마는 다른 아이들의 입에서만 오르락 내릴 뿐 단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름의 파장은 아주 크다. 적어도 여섯 명의 일상을 뒤집을 수 있을 만큼 크다. 그것은 이 아이들이 학교 안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의 눈에는 그들이 고민하는 것들, –물론 안타깝게도 나 또한 미래가 참 어두컴컴하기 그지없다만- 특히 ‘위쪽’과 ‘아래쪽’이라는, 동경과 위안과 부러움과 자만 등등이 뒤섞인 용어에 관한 고민에 대해서 아무래도 시큰둥하다.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학교라는 세상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그 아이들에게는 학교 안의 풍경이 그들의 세상이자 전부다. 그 좁은 세상에서는 인간관계조차 아주 작아 서로를 잇는 실은 아무렇게나 얽히고설키어 있을 것이다. 설령 그들이 대화 한 번 안 해본 사이라고 해도.
소설 속 아이들의 세계는 순정만화도, 청춘연애드라마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일지도 모르지만 만화나 영화 속 인물들 마냥 세상이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류타를 짝사랑하는 아야의 마음이 보답 받을 수 있을까? 히로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밝고 확실한 미래를 찾게 될까?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나약하고, 때로는 비겁하며, 때로는 약아 보이는 그들이 그럼에도 풋풋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그 미완성된 모습 때문일 것이다. 늘 갈등하고 고민하고 화내고 우는 모습과 동시에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웃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가진 생동과 활기가 그들을 소중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