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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칠맛나는 행복으로 살다
  • 그토록 먼 이렇게 가까운
  • 이명연
  • 12,600원 (10%700)
  • 2022-10-27
  • : 76
2022년 10월, 호기심으로 마음을 두드리는 책 『그토록 먼 이렇게 가까운』 서평단 모집에 문을 두드렸고 마침내 여럿 가운데 운이 좋아서 책을 선물받았다. 책을 여니 엽서 크기의 차분한 색감의 종이로 꽃피는책에서 인사말을 전했다.

"〈그토록 먼 이렇게 가까운〉 서평 이벤트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막 꽃봉오리를 틔운 꽃피는책에서는 앞으로 '기억' 관한 이야기들을 전할 예정입니다. 작가의 내밀한 기억이 독자들에게 공감과 울림으로 다가가길 바라면서요. 이 책이 모쪼록 즐거운 공감, 나직한 울림이 되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영화에 기대 우리 모두가 지나온 그때, 그곳, 그리고 그들을 떠올릴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책날개에서 전하는 작가의 소개에 '공부가 직업이지만 공부보다는 주로 고민을 한다'는 말씀에 미소가 방긋거렸다. '고드름의 온도'나 '벚꽃의 주저' 같은 것을 고민하는 작가님. 두근두근 설렘을 안고 이야기 안으로 들어갔다. 책표지를 포함한 네 장을 넘기고, 오른쪽 정렬로 하단의 작은 글씨체로 전하는 작가님의 말씀 일부를 옮겨와서. "이 책에 담긴 글에는 얄팍한 철학도, 사소한 교훈도 없다. 있다면 오직 나뿐, 나의 이야기뿐. 영화에 슬며시 기댄." 이 말을 그대로 믿고 가뿐하게 영화에 슬며시 기댄 이야기를 만나려고 했다.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나 작가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자꾸만 멈추게 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 앞에서.

어느 한 시절이 지나가 버렸다는 것, 빛나는, 아니 빛났어야 할 시간이 가버리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뼈아픈 사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울었다는 것, 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러나 이번에는 울음을, 엉엉을 내놓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한 길을 우리는, 최대한 천천히 내려갔다,
속도가 주는 묘한 흥분이 어둠이 주는 두려움과 섞여 브레이크 잡은 손을 천천히 풀게 했다.
돌아본 한계령은 그저 어둠이었다.
한계령 후, 그 길 후, 삶보다 죽음 쪽에 기울 때가 종종 있다.
나는 내가 보지 못한 그 낡은 '어떤' 옷의 조각조각을 살피는 동안 그간이 내 삶이 말라버리는 것을 느꼈다.
어찌해야 할지, 어찌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했으니까.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럴 때면, 그냥 두었다. 그저 감당했다. 그래야 마땅해서.
모든 사랑은 결국 첫사랑이기에.
두렁에 대파가 올라올 때면, 꼭 한둘은 꽃인 양 꺾어오던
나는 되도록 그녀에게서 먼 자리에 앉는 것으로 마음을 견뎠다.
죽음의 영역인 지는 해를 바라보며 탄생해 삶의 영역인 뜨는 해를 바라보며 완성되지만, 완성된 그 즉시 파괴된 사랑.
그 '천천히'는 정작 파괴의 슬픔을 더 크게 만들고,
끝인사를 내게 처음 양보한, 녀석의 걸음걸이
두 걸음걸이가 담고 있는 슬픔의 비교할 수 없는 깊이와 농도를.
뒤돌아 '엉엉'을 숨길 때로 있었는데,
가끔 기억은 말이 안 되는 것을 말이 되게 한다.
그 눈 오던 그 밤 이래 처음으로, 난, 그 눈, 할머니의 그 눈이라도 보고 싶어졌다. 눈(雪) 속이 꼭 아니더라도.
'논 가운데 집'이라 불리던, 여름이면 대문과 마당 사이 바람길에 둔 평상에서 낮꿈을 꾸던,
창살 사이로 들어오던 허약한 햇살을,
겨울이면 내내 연탄재가 '함부로' 껴져 있던.
이미 깨진 삶 위에 서 있는 존재
부디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더는 속으로 되뇌지 않아도 되기를, 그럴 수 있다면 그의 삶에 강 같은 평화가 넘치기를,
'전쟁'이라는 것은 난생처음 '느껴'야 했으니까, 느끼고 말았으니까.
이제는 안다. 시를 왜 쓰느냐는 대답에 '이래서'라고 대답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대답인지.
'심연'을 어떤 방식으로 들여다보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그날 이후, 그 심연과 같은 무언가를 쓰려 했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은 그 일이 대수로운, 아니 대수로움을 넘어 뼈아픈 상처가 되었다.
그 짧은 새, '자리에 없기를, 부디 없기를' 몇 번이고 되뇌고 바라면서. 하지만 자리는 빈 채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불쑥, 외로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전화를 해주던 이들 덕분에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됐는데, 그 앎이라는 것이 외로움에는 아무 소용도 없다.
울음은 함께하지 못하면 누가 된다.
울음은 그 한동안은 부재중이었다.
우리가 종종 범하는 아주 심한 착각 중 하나,
그런데, 그런데도 '너무도' 부질없게 느껴졌던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날 그 사건 이후
'세월'이라는 단어가 이름인 배와 함께 아이들이 가라앉던 날,
어느 저녁, '다시' 울게 되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시로 우는 울음. 시인인 은사는 그렇게 시로 울고 있었다
울어야 끝나는 일은 결국 울어야 끝난다.
무엇을 부쉈는지, 어떤 일이 끝났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무 한 그루를 키우고 있다.
5년 전부터 나무는 크고 있고, 나는 나름 애써 키우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저. 냉동실에 둔 잎들은 이듬해 봄,
5년이 지난 지금. 작년, 더 큰 놈으로 바뀐 화분에서 나무는 잘 자라고 있다.
'희생'이라는 단어
그 단어는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 감내해야 하는, 아픈 사람의 몫이라며 내게 울먹였다.
그 며칠 후, 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그것밖에 없어 나무 한 그루를 들였다.
나무가 살아 크는 한 그녀도 살고 클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을 갖고.
참, 나무 이름은 그라비올라다.
나는 삶이 일종의 '중독'이라 생각하곤 하는데,
분명함은 내게 갑작스런 욕망을 갖게 했다.
나는 즉시 쓰기 시작했고, 쓰는 동안 생각했다.
그런데, 또 걸렸다. 열심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찾아오는 그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심사(心思)가 또 찾아온 것이다.

여러 나무 중에 '왜 그라비올라 나무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검색을 했다. 그동안 이름만 들어보았지, 어떻게 생겼는지 생김새를 알지 못했다. 이야기 중에 정성스럽게 잎을 채취해 잘 말려서 냉동실에 보관해두고는 쓰임이 필요한 그곳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전하지 못하고. 화분을 큰 것으로 옮겨줄 때 잎을 찢어 거름 삼아 뿌리 곁에 묻었다고 한다. 나무는 5년이 지난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작가님을 뵌 적은 없지만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진다.

작가님께서 들려주신 영화 이야기 중에 다섯 편, 〈후크〉, 〈봄날은 간다〉, 〈죽은 시인의 사회〉, 〈메멘토〉, 〈시네마 천국〉은 예전에 본 영화인데 어쩐 일인지 '메멘토'만 선명하다. 그리고 작가님 덕분에 〈동사서독〉을 보게 되었다.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영화의 내용을 알지 못해서, 이야기를 이해하고 싶어서, 호기심이 일어서, 마침 번거롭지 않게 매월 꼬박꼬박 결제되고 있는 곳에서 볼 수 있어서 가능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아하'하고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 책에 언급된 영화를 한 편씩 다 만나볼까?'로 생각이 이어졌다가 그만두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시간을 몰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몰입의 시간은 언젠가.. '볼까?'라는 마음이 아주 간절할 때, 그때로 미뤄두기로..

자꾸만 멈추다 보니, 약속 시간을 지나친 것은 아닌가 했는데 날짜를 헤아려보니 다행히도 간당간당하게 맞추었다. 책을 받은 지, 어느덧 14일이 지나갔다. 14일 동안 어디든 나와 동행했다. 나의 가방 안에, 머리맡에, 책상에. 읽는 동안 참 좋았다. "덕분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이렇게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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