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24 올해의 책이 정해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
서평단으로 선정돼 읽게 된 책이지만 서평단이 안 됐더라도 읽어야 했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는 라우라라는 30대 여성의 입을 통해 전개된다. 모성은 '사회적 명령'일 뿐이며, 여성에게 출산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이고, 자식은 '언제나 자유를 제한하고 경제적 부담을 주는 존재'라는 단호한 입장의 라우라는 당혹스러운 소식을 듣는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던 친구 알리나가 이제는 임신하기를 원하며 이를 위해 애인과 피임하지 않은 지 1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라우라는 이후 긴 노력 끝에 드디어 임신에 성공했다는 친구의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하지만 여전히 아이를 갈망하는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몇 주 전 이사 온 옆집 가족은 아이에 대한 라우라의 입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늘 지쳐 보이는 싱글맘 라우라와 언제나 화나 있는 아들 니콜라스. 니콜라스가 엄마에게 퍼붓는 욕설은 벽을 타고 라우라에게까지 흘러들어오고, 라우라는 이들이 이웃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멕시코의 페미니스트 여성 시인의 이름을 따 아이의 이름을 '이네스'로 지은 알리나는 의사로부터 예상치 못한 진단을 받는다. 아이의 뇌가 최근 두 달간 전혀 자라지 않았으며 모체와 분리되는 순간 죽게 된다는 것이다.
만남과 동시에 이별하는 것이 모성에 대한 유일한 경험이 될 알리나와 그의 딸 이네스, 죽은 남편이 남기고 간 학대의 경험으로 괴로워하는 도리스와 그의 아들 니콜라스, 임신에 대한 단호한 신념으로 나팔관을 묶은 라우라와 그의 엄마 등 이 책은 여성 인물들을 통해 임신, 출산, 육아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보여준다.
멕시코라는 장소의 생소함을 제외하면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들은 현시대 대한민국과 매우 유사하다. 결혼과 임신에 대한 젊은 여성들의 회의감, 이들이 이기적이라고 낙인 찍는 사회, 아이를 거부하는 딸과 어머니 간의 갈등, 육아하는 여성들의 '불치병 같은 피로감', 그리고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자 자기 삶에 더욱 집중하는 한 방식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거부해 온 연대자가 갑자기 다른 삶의 궤도에 올랐을 때 느낄 수 있는 실망감은 이 시대의 젊은 여성들이 흔히 겪거나 미리 상상하며 걱정하는 것들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었다. 알리나는 모성을 여성들에게 바람직한 운명으로 수락한 반면, 나는 바로 그 모성을 피하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으니까. (33p)
이 책에는 자녀가 있는 여성들이 임신을 거부한 라우라에게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두 번이나 나온다. 그러나 이들은 아이를 갖기로 했던 자신의 선택 역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내가 그동안 임신, 출산과 관련한 여성의 선택을 '잘못된'/'옳은' 선택이라는 두 가지 편협한 시선으로만 봐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 엄마의 고충을 보며 역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안도하는 것과 아이를 낳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있다며 아이 없는 여자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 이 두 입장에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방식을 넘어 다른 방식으로 모성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소설 속 엄마들은 사회가 '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모성과 불화한다. 갓 태어난 아기가 죽기를 바라기도 하고 아이를 두려워하며 방치하기도 한다. 라우라는 사회적인 연결을 거부하며 고립되는 이들의 구체적인 삶을 알아가며 지속적인 관심과 돌봄을 제공한다. 이들이 다른 관계망에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러한 연결 속에서 삶과 조금씩 더 가까워진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모성은 자연스러운 것도, 불행스러운 것도, 아이가 자라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도 아니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 속의 관계'(326p)라는 점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이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고 자신의 삶을 확장할 수 있다.
-“뭐, 벌써 나한테는 많은 걸 가르쳐줬지. 그중 하나는 사랑은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온다는 거랑, 또 모든 일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다는 거.” (311p)
읽기 전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고 어쩌면 끝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족할지언정 같은 자리에 손을 겹쳐 보는 것만으로도, 일부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