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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진맥진님의 서재
  •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 이기호
  • 17,820원 (10%990)
  • 2025-07-17
  • : 17,654
소설이라고는 하나 500쪽이 넘으니 내게는 벽돌책이나 다름없는데...? 그치만 시간도 있으니 읽어보자 하고 도전했다. 가독성이 좋았지만 그래도 하루에 끝내긴 어려웠고 다음날까지 넘겨서 겨우 완독했다. 어쩌면 간단할 수 있는 주제를 위해 동원된 서사는 엄청났다. 가성비추구인인 나는 '작가님 엄청 고생하셨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셨담.' 이라는 생각에 조금 갸웃하기까지....^^;;; 하지만 인정한다. 이 책의 차별성은 그래서 생겨났다는 걸.

그 서사의 줄기는 크게 세 갈래다. 시대별로 놓고 보면 이렇다.
(1) 18세기후반~19세기초반 스페인 왕가와 귀족가의 이야기
(2) 1990년대 후반 프랑스로 유학 갔던 한국 젊은이 세 명의 이야기
(3)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화자와 가족, 친구들의 이야기
이 굵직한 시공간에서 집중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개. 비숑프리제라는 귀한 혈통의 개.

화자인 이시습은 20대 초반의 청년이다. 제목의 '이시봉'은 그집 막내...라고 하지만 사람이 아니고 개다. 몇년 전 아버지가 데려왔던. 타이어공장에서 묵묵히 일하시던 아버지는 어느날 한계가 왔는지 퇴직을 선언하고 피자집을 차렸다. 그러다 바로 가게 앞에서 불의의 고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나중에 알게 된 바, 달려나간 이시봉을 쫓아가다 그리 되셨다고 한다. 이시봉은 여전히 해맑지만 엄마는 더이상 개의 눈을 보지 못한다. 지금은 외할머니 간호차 집을 떠나 있다. 고3인 여동생 시현이는 무섭게 공부에 몰두하고, 결국 이시봉은 이시습의 차지다. 이시습은 독자가 볼 때 약간 안타까울 정도로 백수 폐인 상태이다. 밤중과 새벽의 경계인 시간에 이시봉을 산책시키고, 그때 혼자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온다. 매일 그리 마시니 알콜중독이라 할 수도.

느리고 가라앉은 시간들이 그렇게 흘러갈 무렵, 이시봉을 찾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웃의 리다 누나가 sns에 릴스 하나를 올렸는데 그걸 보고 연락해온 것이다. 그들은 '앙시앙 하우스'라는 곳에서 나온 브리더들이며 대표는 정채민이라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시봉은 비숑 중에서도 '후에스카르' 계열의 매우 희귀한 순종 혈통이며, 그래서 대표가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한다.

90년대말 프랑스에는 가난한 유학생 김상우, 박유정 커플이 있었다. 대책없이 떠난 그들에게 파리는 공부보다도 힘든 알바를 하는 곳이었다. 그러던 중 부유한 유학생 정채민을 만난다. 바로 위에서 말한 그 대표다. 그는 두사람과 우연히 엮이게 되었는데 그들이 맡은 순종 비숑 두마리를 잠시 봐주게 되면서였다. 그때 처음 알게된 개에 대한 마음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는다. 두사람을 먼저 보낸 그도 뒤이어 귀국하고 보니 두 사람과 두마리 개는 자취가 없었다. 앙시앙하우스를 운영하면서도 그는 과거의 그 아이들을(그 혈통의 후손을) 늘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 초반 서사를 무심코 다 믿고 읽었다가 나중 반전에 기막힘;;;)
이 정채민이라는 사람이 의문의 결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정체가 드러나는 과정이 곧 책의 진행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만 봐도 복잡하고, 보통 소설의 분량인 300여 쪽은 넉근히 나올 것 같은데 작가는 더 옛날 유럽의 이야기를 직조에 추가했다. 나폴레옹도 나오고 카를로스 4세, 그의 왕비, 마누엘 고도이라는 총리, 알마 공작부인 등등... 책 앞장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 강아지, 고양이, 사건은 모두 허구이며...." 라고 분명히 되어있기는 하지만 검색해보니 인물 자체는 실존했던 인물들이 아닌가. 왕비가 남성편력이 심했고 특히 고도이를 좋아해서 그에게 권력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고, 고야라는 화가가 알마 공작부인의 초상화를 그린 것도, 그 초상화들 중 한 점에는 하얀 애완견이 예쁘게 단장하고 함께 그려져 있다는 것도.... 참, 이런 걸 자신의 이야기 속에 허구와 적당히 섞어서 직조하는 작가님의 스케일과 능청스러움에 감탄한다. 아마도 착상의 발단은 바로 그 하얀 개가 나온 초상화 아니었을까? 그리고 작가 본인이 키우신다는 비숑 이시봉.... 그것들이 스파크 파바박!! 그리하여 이렇게 벽돌 소설책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 보았다.

결국 등장인물들의 실체와 사연들은 어떠한지, 이시봉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남겨두고 끝내야 할 것 같다. 나는 책을 읽으며 나중에 다시 볼 구절은 메모장에 쪽수를 적어놓는 습관이 있는데, 다 읽고 보니 의외로 초반부의 쪽수가 적혀 있었다. (후반부는 반전에 휘말려서 적지도 못하고 마구 읽은 탓도 있음)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을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라고 보고 싶다. 시습 시현 남매의 대화 장면인데, 엄청 똑소리나는 시현이 한 말들이 거의 진리 수준이었다.

"이건 비단 오빠 개인만의 문제라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오빠는 그만큼 이시봉이라는 타자를 오빠라는 자아의 시선으로만 보고 있다는 증거야. 이시봉은 오빠라는 자아한테 먹힌 타자인 거지. 그건 이시봉을 이해하거나 위하는 일이 아니거든. 오빠는 사실 오빠를 위로하고 있는 거지. 그럴수록 이시봉은 더욱 더 소외되는 거고." (188쪽)

다음 말은 더욱 더 똑부러진다.
"이론적으론 인간과 동물은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어. 어쩌면 동물들은 인간을 그렇게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인간은 아니라는 거지. 인간은 자기에게 이로운 존재나 친근한 동물들에게 더 높은 계층을 부여하고, 그 친구들에게만 복지를 부여하려고 애쓴다는 거야. 그게 점점 더 심해지고 심화되고 있다는 게 문제고.....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 그런 게 그 증거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인간이 동물을 바라본다는 증거." (189쪽)

다음 말은 결정적 한방이다.
"인간은 자꾸 동물을 인간화시키려고 해. 그것도 자기와 친한 동물들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동물화는 참지 못하는 게 또 인간이야." (189쪽)

이시봉 자신에게는 혈통이 무슨 의미일까. 나폴레옹 시대 때부터 관리해서 지켜온 혈통이든 아니든 지금은 폐인같은 주인 곁을 나른하게 지키고 있는 시고르자브종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정채민 쪽 인력인 수의사가 한 말이 그의 의도(순수한 의도는 아녔음)와는 상관없이 내 마음에 남았다.
"좋은 보호자 아래서 개들도 행복한 거예요" (109 쪽)
주인이 세상의 전부이도록 반려동물들을 만들어놓고, 주인이 불행하거나 악하면 걔네들은 어떻게 되는 거겠어... 사람들도 동물들도 좀더 행복한 세상이 오면 좋겠으나.... 일단 기본 방향이 잘 잡혀있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다. 그나마 그것을 뻘처럼 붙잡고 있는 것은 시습의 친구들처럼 내가 힘들 때 혼자 내버려두지 않고 함께하는 사람들, 외로워죽을 사람 옆에 무심히 버티고 있는 어떤 존재(그게 개라도). 내가 좋은 사람이어야 할 이유는 이렇게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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