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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진맥진님의 서재
  • 나나 올리브에게
  • 루리
  • 13,500원 (10%750)
  • 2025-11-20
  • : 101,890
나는 창작을 시도해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선 어딘가 동경이 자리잡고 있긴 한가보다.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무한대에 가까운 창작물이 이미 있음에도 사람들은 곡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든다.

그중 어떤 작품 앞에서는 '아, 이건 나에게 절대 해당없는 일이구나. 감상 만으로도 벅차. 난 절대 이런 걸 떠올릴 수조차 없어' 라는 마음이 된다. 그러니까 작품을 분류하는 기준은 아주 많지만 이런 분류도 있다는 것이다. 창작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게 만드는 작품 : 그렇지는 않은 작품.ㅎㅎ 긴긴밤이 바로 그랬었는데 이 작품도 그러네. 미술을 전공하셨다는 작가의 내면에 이런 이야기의 토양이 있고 전공에 따라 자신이 창작한 세상을 그려서 보여줄 수도 있다는 것이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런 이들이 소수라는 점에 위안을 느껴야 하나?^^ 그보다는 독자들에게 주어진 역할-감상에 기쁨을 느껴야 할 것이다.

루리 작가가 구축하는 것은 이야기의 얼개만은 아니다. 내가 감탄하는 것은 그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슬프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하면서 묘하게 희망이 차오르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한 분위기. 분위기를 창작하는 작가들이 있다. 외국 작가로 한명 예를 든다면 케이트 디카밀로 같은. 이들은 무엇으로 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문체일까? 표현일까? 그래서 그들의 문장에는 적어두고 싶은 것들이 많다.

어딘지 특정하지 않았고 우리나라는 분명히 아닌 배경. 하지만 이국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고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는 것 같으며 묘한 그리움까지 불러일으킨다. 그곳은, 전쟁의 포화속에 무너진 곳인데도.

파괴와 살상. 개인과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비명과 고통, 눈물만 남기는 전쟁을 왜 사람들은 멈추지 못할까?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와 나란히 왔으며 아직까지도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고등동물이 아니며 가장 어리석은 존재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 이 순간 나는 분노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나를 위로한다. 거악의 지붕 아래에서도 서로 손내밀며 그리워하고 추억하며 살아가는 선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표지에서 보이는, 휘어지고 일부가 떨어져나간 올리브나무가 서 있고 개가 지키고 있는 집. 몇 세대를 지나는 동안 많은 사람이 머물고 지나갔었고 한결같이 그리워하는 곳. 주변에는 그저 소문으로만 떠도는 집. 그곳이 바로 '나나 올리브'가 사는 '올리브나무집'이다. 이집은 늘 문을 열어두었고, 개가 있다. 그 개(들)는 쓰러지거나 길 잃은 이들을 집으로 이끌어주기까지 한다. 그 집 또한 폭격이 피해가진 않았고 가족들은 떠나기도 하고 남기도 했는데, 사람이 없었던 기간에도 개는 남아 집을 지켰다. 이 책에 개가 나오는 이유는 개의 그런 성품 때문인것 같다. 지킴, 기다림. 개의 유전자에 새겨진 듯한 그 '기다림'은 가끔 내 가슴에 통증을 준다. 왜 그렇게 기다려.... 그런데 그들은 기다린다.ㅠㅠ

그집에 머물렀던 이들 중 두 명이 집을 찾으려고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때 그들은 젊은 군인과 소년이었지만 지금은 노인과 중년이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병 치료를 앞둔 군인을 놓고 소년이 먼저 길을 떠난다. 드디어 그 집을 발견하던 순간 미친듯이 뛰는 심장의 고동이 독자들에도 전해진다.

내려앉고 썩어가고 황폐해진 집에서 (과거에 소년이었던)중년은 오래된 노트를 한권 발견하고 치료중인 (과거에 군인이었던)노인에게 부친다. 노인은 그 노트를 읽기 시작했다. 그건 편지였다. '코흘리개'라고 자신을 칭한 누군가가 '나나에게' 보낸 편지 모음이었다. 부칠 수 없는 편지였고 다른 말로는 일기라고도, 생존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글들이었다. 이 편지가 액자 안의 그림처럼 가운데에 자리하고 주변에 이 소년(다리스)과 군인(윌터)를 비롯, 그 집과 인연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다. 퍼즐맞추기가 꽤 필요한 독서였다.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닌데 숨을 죽이고 끝까지 읽게 되는 건 이 퍼즐맞추기의 힘이 컸다. 감동은 작은 선의가 연결되고 이어져 흐르는 서사 속에 있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속에서 다 잃고 겨우 남은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슬픔을 안고 있어요. 그 사실이 니를 버티게 해요. 가끔은 슬픔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그만 잠겨버리고 말 것 같을 때, 내 옆에 나처럼 턱밑까지 차오른 슬픔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헤엄쳐 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아, 아직 괜찮구나, 하고 따라서 헤엄을 쳐요. 헤엄을 치는 나를 보고 또 다른 누군가 역시 헤엄을 치겠지요.
우리는 이렇게 시커먼 슬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지어 헤엄을 치고 있어요.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요." (104~105쪽)

"가족은 떠나기 전 통조림 몇 개를 주고 갔어요. 곧 겨울이 오는데, 뒤이어 오는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면 좋겠다면서요. 불행한 사람들은 더 불행한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려요. 그러면 불행에서 한 발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가족이 남긴 통조림은 누군가를 잠시나마 불행에서 멀어지게 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그 누군가는 그 잠시 동안 또 누군가를 해아릴 수도 있겠죠.
불행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어요.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서로의 허리를 끈으로 묶고 가듯이요. 그래서 불행에서 한 발 멀어질 때마다, 다른 누군가를 한 발 더 끌어 올리는 거예요. 그 뒤에 있는 사람도, 그리고 또 그 뒤에 있는 사람도요." (158~159쪽)

거대한 악의 지붕 아래에 웅크린 사람들이 이렇게 작고 거친 손을 이어 잡고 자신에게도 넉넉하지 않은 것을 나눠주는 모습은 슬픈가? 아름다운가? 둘 다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 또한 두 느낌을 모두 담았다. 눈물겹지만 폐허 사이로 비쳐드는 빛의 느낌은 따스하다.

오늘 예배 때 목사님이 읽어주신 말씀을 듣고 이 책의 이미지가 또 떠올랐다. 내가 그 주제를 엮을 통찰은 없으나 '아무 것도 없는 자' 라는 말씀이 마음에 특별히 다가온다. 이 책을 읽은 후라 특히 그런 것 같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폐허 속에서 이어진 연대는 그래서 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큰 작품 하나가 또 탄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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