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이런 책은 처음 봤다. 책장이 정신없이 휙휙 넘어갈 만큼 읽기 쉬우면서도, 내용은 매우 불편하다. 결말이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빨리 읽으려고 서두르게 되지도 않는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유언이 함께 있고싶지 않은 가족들과 일주일간 집에
쳐박혀있어야 하는 것이며, 아내는 상사와 바람이 났다는, 그야말로 최악중에서도 최악인데도 웃다가도 갑자기 눈물흘릴만큼 예고없이 슬프다. 과연 이
책을 정의내릴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책을 덮은 후에 이 책의 소개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니, 모든 표현들이 얼마나 적절했는지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말 그대로 '폭소를 터뜨리면서 읽다가도 알싸한 슬픔과 함께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보석 같은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에 익숙하거나 잘 알지도 못 할 뿐더러, 유대인들의 문화 또한 전혀 알지 못하는 내게, 어떻게 주인공 가족들이 이렇게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묘사가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실감난다. 물론 콩가루집안에 하나같이 제멋대로인 이들을
절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주인공 저드는 한꺼번에 아버지와 아내와 상사와 직장과 집을 모두 잃었다. 그런데 바람난 아내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찾아왔다. 자기 자신이 실제보다 더 못난 놈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 힐러리는 자녀 양육 분야의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그들의 자식들은
모두 그런 어머니의 덕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자랐으며, 이웃집 린다 아줌마와 연인사이다. 한마디로 양성애자인것이다. 큰형 폴은 이런 집안에서
유일하게 기대를 받고 자란 야구 유망주였지만, 대학 입학 직전에 저드를 때린 친구를 흠씬 두들겨패주러 갔다가 그 집 사냥개에게 어깨를 물려
여러번의 수술을 거치고 인생이 바뀌었다. 그리고 저드를 원망하게 된다. 그의 아내 앨리스는 저드의 첫 잠자리 상대였다. 저드의 첫 여자친구에서
형수가 된 앨리스는 불임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누나 웬디는 학창시절부터 화려한 남성편력을 자랑했고, 이웃 린다 아줌마의 아들인
호리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가 불의의 사고로 뇌에 문제가 생기면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웬디를 때리게 된 후에 그를 떠나 현재의 일벌레(지만
부자인) 남편을 만나 아이를 셋 두었다. 늦둥이 동생 필립은 제멋대로에 여성편력도 심하지만 항상 유쾌하고 때때로 모든 상황을 정리해주는 의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사연 많고 복잡한 이들이 아버지의 추모 행사 때문에 일주일간 한 집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한 식탁에 둘러앉을때면
언제나 싸움이 나지만, 이들만큼 서로를 잘 아는 가족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들이 이렇게 다투기만 하는 건, 서로를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저드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읽으면서 저드가
아내 젠에게 돌아갈지, 아니면 학창시절 좋아했던 페리에게 돌아갈지 궁금했는데, 그 둘 모두에게 갈 수 있는 갈림길에서, 저드는 그 둘 모두에게로
가지 않았다. 저드는 그 모든걸 이 소설이 끝나기 전에 결정할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도 그의 인생은 펼쳐져있고, 가능성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가족간의 사랑과 인생의 가능성. 표현이 진부하지만 언제나 옳을수밖에 없는 이 것이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이
진부하고 뻔한 주제를 이렇게 재미있게, 독자들을 주물러 울리고 웃기며 표현해내 준 작가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번역에도 민감한 편인데,
거슬리는 부분 없이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옮긴이의 탁월한 단어 선택과 문장력 덕분이었으리라.
끝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을 덧붙여본다.
"문제는 풀 수 있는 게 문제지." 필립이 말했다. "해답이 없다면 그건 문제가 아니야. 그러니까 이걸 문제로 보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