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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의 서재
  • 백지 앞에서
  • 최은영
  • 15,750원 (10%870)
  • 2026-04-30
  • : 71,270

소설을 쓸 때의 나와 특정 감정을 느꼈던 순간의 나 사이에는 시간적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일기를 쓸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 날 있었던 일을 써야 했기에 내가 느낀 감정을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 P15
나는 진짜를 쓰고 싶었다. 진실하고 싶었다. 그것이 촌스러운 생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인간으로서는 그토록 비겁하게 살아왔을지언정 작가로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게 글쓰기는 남에게 보이고 싶은 내 모습을 꾸미기 위한 장식도, 타인의 호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도 아니었다. ...나는 진짜가 되고 싶었다. 그게 어떤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P64
아주 짧게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눈 이별과 그럴 기회조차 없었던 이별은 전혀 다르다는 걸 그때의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존재와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영영 헤어진다는 건 한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일이라는 것도. - P76
아플때면 어쩔 수 없이 아픈 부분을 의식하게 된다. 만성적인 위경련을 겪는 사람은 위를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무릎이 아픈 사람은 무릎을, 마음이 아픈 사람은 마음을 의식한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무릎이나 마음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순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데됴. - P81
그 순간 밖에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아기는 머리를 움직여 그 시끄러운 소리를 따라가려고 애썼습니다. 그게 자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소리라는 걸 아직 모르는 거였지요. 몇 주 지난 뒤 다시 만난 조카는, 벌써 자동차 소리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극에 놀라고, 그게 뭔지 평가하고, 받아들일지 말지 분류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동안 그 자극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배운 거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언젠가는 예쁜 돌멩이가 보일 때마다 멈춰 서거나 웅덩이를 만날 때마다 뛰어넘거나 하지 않고 여기에서 저기까지 곧장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어른이 되면 세상일에 너무 익숙해져서 큰 산이라든지 보름달이라든지 다른 사람의 사랑 같은 걸 당연히 여기게 됩니다. 그런 것들의 위대함을 다시 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P89
잊어버려도 괜찮단다. 그가 말했다. 또 그러는 편이 좋아. 사실 우리는 때로 잊어야 하지. 잊는 건 중요한 일이란다. 일부러라도 그래야 해. 그래야 좀 쉴 수 있거든. 듣고 있니? 우리는 잊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영영 잠을 잘 수 없게 될 거야.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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