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즈는 육체에 대한 별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미디어가 내세우는 정형화된 육체에 어긋나는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의 몸을 거부하는 순간, '나'는 점점 먼 곳으로 사라진다.
로즈는 Thin Girls를 일일이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은 주체적 개인을 상실했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시설의 여자들은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다. 로즈의 독백은 끊임없이 자신의 몸에 대한 거부를 드러낸다. 로즈는 이것을 '침입자가 된 기분'이라고 표현한다. 기존의 몸을 부정하면서 로즈는 '새로운' 몸을 긍정하게 된다. 마른 몸을 위해 스스로의 욕구를 통제하는 것으로부터 기쁨을 느낀다. 여성들은 정형화된 몸을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고 통제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기쁨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을 억제하는 것을 기뻐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기쁨'이 아니라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한다. 소위 말하는 '못나고 뚱뚱한' 여자들은 미디어에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예쁘고 마른' 모습으로 '변신'해야 한다. 우리는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미디어의 세뇌를 합리화하면서 그런 변신을 해 왔다. 사회는 '아름다운 여자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마치 그런 것들이 모든 여성에게 어울리는 옷이라는 것처럼.
『마른 여자들』은 여성의 몸에 대한 이슈 외에 퀴어에 대해서도 다룬다. 로즈는 십대 시절부터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제미마 같은 인기 여학생을 향한 감정을 동경과 모방으로 치환한다. 작중 등장하는 제이램은 로즈가 시설에서 만난 남성 연인이다. 로즈는 제이램과 유리창 너머로 꽉 막힌 소통을 하고, 육체적 사랑을 나눈다. 제이램은 로즈의 상상 속 연인이다. 로즈는 '사랑'과 '함께 늙는 노년'을 상상하지만 제이램은 로즈와 파티에서 만나 관계를 갖는 것을 상상해왔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부정하며 제이램과 성애적 관계맺기를 시도한 로즈는 그의 음경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다. 제이램은 로즈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연인이고, 로즈는 그러한 행위로부터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마른 여자들』은 가스라이팅에 대해서도 다룬다. 릴리는 아이가 있는 유부남 필과 교제하면서, 다이어트 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는 그의 권유를 따라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필과 그의 부인 라라 백스가 만든 다이어트 식품을 먹는다. 릴리는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 위해 필의 요구와 권유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 안타까운 점은 음식을 거부하는 로즈 자신도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즈는 자기를 통제한다는 것에서 오는 기쁨, 그리고 마른 모습인 자신을 포기할 수 없다. 프로아나 모임은 잠깐 동안 지속되다가, 동창 로런이 죽고 플리의 건강이 악화된 후 해체된다.
로즈는 프로아나 모임의 로런과 한때 쌍둥이의 우상이었던 캣 미첼스의 죽음을 겪는다. 릴리를 위해 속임수를 써 시설에서 나왔던 로즈는 밈과의 재회 이후 본격적인 회복을 결심한다. 마른 여자들은 '나'를 존중하기 시작한다. 로즈는 밈의 할머니 그레이스 그린의 집에서 회복을 시작한다. 스스로를 치유하며 그림을 그리고, 요리를 한다. 로즈는 그림을 통해, 릴리는 글을 통해 깊고 오래된 상처에서 벗어난다.
라라 백스가 판매한 다이어트 식품으로 익명의 여성이 죽고, 릴리가 뇌진탕을 일으킨 뒤 이들은 한자리에 모인다. 릴리, 로즈, 밈, 그레이스, 그리고 라라 백스까지. 라라 백스는 인스타그램을 지운 것을 질책하는 필의 전화를 받지만, 밈이 그것을 끊는다. 이 장면은 자기 자신/남성/사회로부터 받던 학대에서 벗어난/벗어나기 위한 여성들의 연대가 시작되는 순간으로 보였다.
사회와 미디어는 끊임없이 여성을 옥죈다. 옮긴이의 말에 있듯이, '여성의 몸은 숫자로 재단'된다. 숫자로 재단할 수 없는 여성의 몸은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작가는 로즈의 입을 빌려 '여성의 몸에 대한 언급을 중단하라'고 말한다. 언급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요즘은 '얼평/몸평'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면서, '예쁘다'고 말하는 것 또한 '평가'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타인의 몸에 대한 언급 자체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몸은 오롯이 나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를 찾기 위해 힘겹게 싸우는 여성들의 경험을 그리고 있다. 『마른 여자들』의 저자 다이애나 클라크는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담담하게 적어내려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마치 그들의 이야기가 내 것인 듯한 경험을 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이야기'보다는 '모두의 이야기'에 가까울 것이다. 나와 내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 나는 전혀 모르는 지구 반대편 여성의 이야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건강한 식이요법의 중요성이나 불륜과 가스라이팅, 퀴어적 코드, 자매애 등의 지엽적인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600쪽이 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진정한 나를 마주하는 것'을 강조한다. 소설 내내 반복해서 나오는 어구처럼 말이다.
"당신만의 평화를 지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