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위리엄 폴 영.
난 종교는 없다. 하지만 신앙은 있다. 신앙의 사전적 정의가 ‘믿고 받드는 마음’이라면 나의 신앙의 대상이 신은 아니지만 ‘올곧은 삶의 태도’, ‘선을 추구하는 가치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신뢰에 기반에 인간관계’ 등이 나의 신앙이다. 다소 종교에 배타적인 나로선 종교적인 내용이라고 해서 사전에 부담감이 사알짝, 느껴졌다. 그래도 소설인지라 일단 펼쳤다.
이 책은 놀랍게도 6자녀를 둔 아빠가 아이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쓴 책이란다(와우, 전문 작가도 아니고, 종교지도자도 아닌 평범한-삶의 질곡이 심했던- 아빠가 자녀들에게 선물하려고 몇 쪽의 동화가 아닌 420여 쪽의 양질의 장편 소설을 쓰다니!)
가까운 지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복사본 몇 부를 돌린 것이 소문이 나서 결국 출판을 하게 되었고 49주 동안 뉴욕타임지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단다.
읽고 나니 신에 대한 착오적인 편견을 깰 수 있고, 종교의 편집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하지만 ‘밀양’ ‘모세’ 영화를 거부했던 종교인이라면 이 책도 거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혹시나 성경에 대한 상식이나 이해를 기반하고 있었다면 은혜가 깊었을까? 오히려 무지했기에 감동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 소설 속 주인공 메켄지는 다섯 아이를 둔 다정다감한 아빠. 캠핑을 갔다가 막내 딸이 유괴살인 된 후 삶은 엉망이 되어 버리고 신을 원망, 의심, 거부한다.
3년 반 후, 딸이 살해되었던 장소였던 오두막으로 ‘파파’의 초대장을 받는다. 살인자의 장난인지 진짜 파파(하나님)의 부름인지 반신반의하며 찾아간 오두막에서 하나님, 예수. 엘루시아를 만나 삼위일체면서도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신들과 2박 3일을 지내게 된다(결과적으로는 지나치게 생생한 꿈이었지만)
딸의 죽음과 관련하여 원망과 분노에 찬 자신을 신에게 내보이며 반항? 할 때마다 신들이 답을 하는 형식이다. 신들의 따듯한 설명으로 신의 의미와 역할, 종교에 대한 태도에 대해 재고하는 기회를 갖는다. 그러면서 비로서 죽은 딸아이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살인자에 대한 용서까지가 가능하게 된다.
평소에 종교에 대한 생각은, 인간을 사랑한다면, 진정한 평화를 수호한다면, 하나님은 왜 세월호 사건이나 숱한 전쟁피해도 사전예방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어렴풋이 해소 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신들의 설명이 어떤 계시라기 보다는 인간관계, 혹은 자기반성의 묵시록으로 해석되었는데도 깊은 울림들이 많았다.
아마도 종교적인 갈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시원한 소나기같은 갈증해소가 될수 있을 듯도 하다.
상당히 많은 밑줄긋기다
-하나님은 영이며 남도 여도 아니라고 믿었지만 그래도 당연히 백인 남자의 모습으로 받아들였을까?
영혼은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치유된다.
gilt(금박)테두리로 장식된 값비싼 책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이라면 어쩌면 그것은 guilt(죄)의 테투리 였던가?
나(신)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자유는 결코 강요될 수 없는 것.
새들은 대부분 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나 땅에 앉아있는 것은 날 수 있는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지 반대가 아니다.
사람은 사랑받도록 창조되었는데 사랑받지 않는 것처럼 산다면 그게 바로 당신의 삶을 제한 하는 것. 사랑받지 못하고 사는 것은 새의 날개를 잘라서 날아다니는 능력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이해해보려고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모습들을 모아서 최대한도까지투영하고, 자신들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선함을 인수분해 한 후에 그 대단치도 않은 결과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한계가 아니라 비상이다. 내가 곧 사랑이다.
자신이 원할 때 자기본성의 한계 안에서만 사랑할 수 있는 신은 재양이다. 따듯하고 단순하고 친근한 진실이 거룩함이다.
존재는 겉모습에 불과한 외모를 항상 초월한다.
나는 나를 화나게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한다. 나에게 화란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다.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벌을 줄 필요가 없다. 죄는 그 자체가 벌이기 때문에 안에서부터 당신을 집어 삼킨다. 내 목적은 죄를 벌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치유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밀양이 연상되었고, 이 논리에 의하면 비로소 이해가 갔다.)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군림할 필요가 없다. 서열도 의미가 없고, 정치 사업 결혼 등 인간의 모든 제도가 계급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데 서열이 정해지면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하고 결국에는 일종의 명령 계통이 사슬이나 질서체계가 필요해지기 때문에 관계가 증진되기 보다는 퐈괴되는 것. 권련과 분리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다. 사슬은 아무리 황금일지라도 사슬이다.
사람들은 관계를 버리고 독립을 택하면서 서로 위험한 존재다 되었다. 타인은 당신의 행복을 위해 조종하거나 복종시켜야 할 존재가 되는 것.
당신들이 생각하는 권위란, 강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조종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진정 서로에게 관심 갖는 법을 배웠다면 위계질서가 필요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너무 헤매고 상처도 많이 입은 나머지 위계질서없이도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는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과도 위계질서 안에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조의 최고의 영광으로서 당신은 신의 형태대로 만들어졌고 어떤 체계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유로이 존재할 수 있다.
고토와 아픔을 근절하는 대신 받아들이는 데에는 수백만가지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들 대부분은 각자의 이야기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신은 악이 아니예요. 당신들이야말로 관계속에서 두려움과 고통, 권력, 권리를 쉽게 받아들이죠. 당신의 선택은 내 목적보다 강하지 못해. 나는 당신의 모든 선택을 이용해서 궁극의 선을 이루고 가장 사랑스러운 결과를 얻겠다.
망가진 인간들은 겈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만 그런 것에선 만족도 자유도 얻을 수 없어요. 그들은 권력이나 권력이 제공하는 안정의 환각에 중독되어 있다.
신뢰는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관게 속에서 맺어지는 열매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무신론자들에게 보내는 충고처럼 들린다)
사랑은 결국 아는 것을 표현하는 것.
사랑받으며 사는 법을 배우는 것, 인간들에게는 쉬운 개념이 아니다 함께 나누는데 인색하니까 어떤 의무도 없이 자유로이 사랑하면 된다.
거짓에는 무한한 조합이 있지만, 진실의 존재 방식은 하나 뿐이다.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이 있을 때 더욱 더 철저하게 기쁜에 넘쳐 악을 행한다.(볼레즈 파스칼)
은혜가 꼭 고통의 도움을 받아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서 여러 가지 색채의 은혜가 발견되는 것일 뿐.
정직이라는 위험을 택하길.
하나님은 동사다. 성경에는 책임이라는 단어가 없다.
기대라는 말에는 미래나 결과를 모르면서 바라는 결과를 얻기위해 행동을 통제하려 한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은 기대를 통해 행동을 통제하려고 애쓴다.
우선권을 갖고 살면 모든 것을 위계질서나 피라미드로 보게 된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여 어느 정도여야 충분할까, 여러 가치를 나열한 목록 중에서 첫 번째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싶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보다 모빌의 한가운데. 친구 가족, 생각, 행동 등 삶의 모든 것이 나와 연계되어 존재의 춤 안에서 바람과 같이 경계 없이 움직이고 싶다.
율법은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고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믿게한다. 타인들보다 자신이 더 높은 기준에 맞춰 산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네가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를 신에게 놓아주고 나로 하여금 그를 속죄하게 한다는 의미다. 용서는 잊는다는 것과는 달리 용서는 다른 사람의 목을 놓아주는 것. 용서란 너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증오보다는 사랑과 용서에서 더욱 큰 힘을 갖는 본성을 찾으라.
너의 죄를 상기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율법은 예수로 인해 소멸되었다.
잘못된 일에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반응이지만 분노와 고통과 상실감 때문에 용서하지 못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