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미 비포 유와 같은 인간의 감정에 충실한 관계소설이다. 연예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단순한 이성관계가 아니기에......
잠시도 호흡기를 뗄 수 없는 말기암을 앓고 있는 16세 소녀 헤이즐과 근육암으로 한 쪽 다리를 잘라내고 의족을 단 17세 소년 거스가 인생이라는 한시적인 시간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과 주변인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이어가고 고통스럽게 마무리 하는지 잘 나타나있다.
상실의 시간들(최지월)에서처럼 밤새 안녕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은이의 삶은 남은 이들이 미숙하게 임의대로 처리하게 된다. 하지만 두 주인공들은 하나 하나 죽음을 준비하고 대비한다.
처음엔 거스의 여자친구가 암으로 죽었음을 안 헤이즐은 거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했다. 자신이 죽으면 거스에게 또 상실감을 줄 것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이즐과 거스는 서로에게 시간이 조금밖에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특하게도 헤이즐이 좋아하는 소설 ‘장엄한 고뇌’라는 책이 발화점이 되어 점차 가까워진다. 비참해하지도, 좌절하지도, 무엇보다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그 책을 거스에게 권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 스토리가 마무리가 되지 않고 끝나는 내용이어서 너무나 궁금하게 생각하며 ‘속편은 나오지 않는지, 아니면 그 다음 내용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무너무 궁금해 한다. 작가는 유일하게 그 작품만을 저작하고는 은둔생활에 들어가버려서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거스는 헤이즐을 위해 기어이 작가를 찾아내고, 암환자들을 대상으로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단체를 통해(와우 소설이라 가능한가?) 그 네덜란드로 작가를 방문해서 직접 답을 듣는 이벤트를 준비한다.
헤이즐은 여행 준비중에 악화되어 집중치료소에서 치료를 받았고, 거스는 여행 직전에 상태가 재발되어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거절하고 함께 여행을 떠난다. 가서보니 작가 반 호텐은 말기암 환자보다 더 상태가 안좋은 알콜중독자이고 괴짜이다. 기대했던 답을 듣지도 못하고 오히려 상처만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행은 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생의 선물이 된다.
여행 후 거스는 수순처럼 악화되고 헤이즐에게 추도사를 부탁하고 예행연습 후 8일만에 죽는다. 헤이즐은 큰 상실에 빠지지만, 거스가 ‘장엄한 고뇌’의 후속편을 반 호텐을 통해 전해주도록 준비했다는 감동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책임져야 할 죽음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야.(왜 채식을 하냐는 질문에대한 헤이즐의 답변. 대단하다, 난 나의 채식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못했었는데 이제부터는 이렇게 답변하면 될 것 같다.ㅋ)
*건강한 날 며칠을 위해서라면 나의 아픈 날 전부를 내놓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헤이즐)
그가 읽는 동한 나는 잠이 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에 빠졌다. 천천히, 그러다가 갑작스럽게...(함께 여행가는 비행기에서 잠드는 거스를 보며.16살 인생이 사랑을 어찌 이렇게 표현 할 수 있을까)
*내가 내 목숨을 잃는 대가로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게 두려운거지. 위대한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최소한 위대한 선을 위해서 죽어야하지 않겠어? 난 내 삶도 죽음도 그렇게 의미있지 않을까 봐 두려워.(고통이 심해지는 날들 속에서 거스가 헤이즐에게)
*넌 나에게 한정된 나날 속에서 영원을 줬고 난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거스의 추도사를 예행연습하면서, 헤이즐)
사실, 인간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다 간다. (올해 92세이신 울 아버지도 결국은 지금까지, 앞으로 남은만큼 시한부가 아니던가.)
시간을 더 많이 가진 자의 오만이 아니라, 시한부 인생이 꼭 처참하지만은 않다고 느낀다. (내 삶이 시한부가 아니라는 것을 누가 보장하랴, 오늘 아침에도 계단에서 미끄러져 하마터먼! 횡사할 수도 있었는데!!! )
단지, 암이라든가 극단 적인 병을 갖게된 사람들은 시한이 조금 가깝다는 것을 알기에 시간이 좀더 밀도있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멀쩡하게 인생의 주변부에 알짱거리다가 예고도 없이 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생의 마감을 준비하고 대비한다는 암적 잇점(작가의 표현임)이 있을 수 있다.
유한한 생의 한가운데서도 유머를 잃지않고, 생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청소년들의 진지함은 ‘계속해보겠습니다’(황정은)의 청춘들보다 훨씬 의젓하다.(물론 의젓함이 생을 구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한시적인 시간 안에서 운용할 수 있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그 안에 내재된 관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영화로도 상영되었나 보다. ‘안녕 헤이즐‘ 광고에 찍힌 인물만으로도 영화의 몰입도가 있었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