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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별의 책꽂이
  • 진공 붕괴
  • 해도연
  • 16,200원 (10%900)
  • 2025-04-30
  • : 810

첫 작품 <검은 절벽>의 시작은 섬뜩했다.

빛이 없는 공간, 암흑물질뿐인 우주 공간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파악해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 라미는 우주선 '다이버전스'에서 깨어나고, 어떤 사고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주선의 인공지능 '러브조이'와 대화를 하며 사고의 원인과 어떤 미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지난달 『코스모스』를 읽은 뒤라 그런지, 관찰자의 위치에 따른 별의 시상 변화,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이 태양계밖에 있음을 알아가는 모습, 가속운동을 하는 우주선과 시간의 상대성 등 나의 호기심을 잔뜩 발동하는 배경지식들이 잔뜩 깔려있어 순식간에 책에 몰입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학적 사실과 상상력만 이 책에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6편 모두 과학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와 감정, 윤리 등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검은 절벽>에서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와 신뢰, 고립된 우주선 상황 속에서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 그리고 끊임없이 생존을 위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라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 속 인공지능에는 감정이 있고 인간과 교감을 한다. 인공지능의 감정을 인간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알고리즘에 의해 표현된 감정이 의식을 가진 존재가 표현하는 감정과 같을까?

 


<텅 빈 거품>은 우주의 진공 붕괴를 피하며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항성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호버만-다이슨 스피어'가 등장한다. 앞으로 태양계 파괴까지 남은 시간은 150년. 주인공 상미는 인류의 마지막 유토피아로 떠날 것인가, 아니면 호버만 다이슨 스피어를 타고 지구를 탈출하여 외계행성을 떠돌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한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주에 빛 보다 빠른 물체는 존재할 수 없지만, 소설 속에서는 광속을 뛰어넘어 이동을 하는 고차원적 존재(외계인)이 있다는 설정을 했다.

  

소멸을 앞둔 오늘의 안락함을 택할 것인지, 혹은 불확실한 내일이지만 생존을 하며 끝없는 방랑을 할 것인지 갈등하는 주인공을 보며 진정한 유토피아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실현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고통 없는 삶과 계속되는 삶 중 무엇을 택해야 할까?

 ​

<마리 엘리 에스>는 인공 뇌를 이식받은 마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 유진은 인공 뇌 실험을 자원했던 아내를 잃고, 이후 아내의 기억을 바탕으로 마리에게 인공 뇌를 이식했지만 마리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다.


인간의 뇌신경 데이터를 기계와 연결하는 기술이 언젠가는 실현되지 않을까?

기억이란 데이터로 저장될 수 있다 해도, 그때의 감정과 의미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마리는 아내의 기억을 부분적으로 담고 있고, 아내를 닮은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은 아니다.

심지어 그녀의 인공 뇌의 의식은 길어야 하루 정도만 유지된다.

기억과 의식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어제의 마리가 오늘의 마리와 같다 할 수 있을까?


마리는 아내가 될 수 있을까부터 어제의 마리가 오늘의 마리와 같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 그 자체로 인간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있었다.


비슷했던 내용으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이 떠올랐다. 아내의 일부 기억을 인공 뇌에 이식하여 만든 마리를 통해 부분적인 기억으로 구성된 존재가 여전히 '그 사람'일 수 있을지 하는 문제는, 병약한 아이 조시를 대체할 대체품인 '클라라'를 통해 외형, 태도, 기억을 따라 하는 존재라면 하나의 존재를 대체할 수 있는지 하는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기술로 존재를 복제하는 것이 가능할지라도, 존재는 복제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란 기억을 가진 몸과, 시간과 경험의 누적, 감정의 총합으로 만들어진다.


<콜러스 신드롬>에서는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진 재호가 딸 윤하를 되찾기 위해 과거를 여러 번 반복했지만, 그 선택이 오히려 아내 유슬의 삶을 파괴했고, 결국에는 자신까지도 파괴한다.

그는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의 죄책감을 덮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의 반복일 뿐이다.

시간을 돌린다고 상실을 복구할 수는 없고, 스스로를 고통 속에 얽매이게 했다.


우리의 삶은 한번뿐이기에 아름다운 것이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있기에 가치 있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가 떠올랐다.

니체는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진 선택과 행동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상상할 때 이것을 견딜 수 있느냐고 물으며,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라 말한다.

고통스럽고 후회되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긍정하고 가치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재호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매 순간을 새롭게 살지 않았다.

그의 반복은 오직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시간은 계속 반복되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고,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다.

 

마지막 작품인 <안녕, 아킬레우스>도 타임 루프 속을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 주인공 피터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시간 역행이라는 SF 단골 소재지만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이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영상화 계약이 체결되었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실제 제작까지 연결되지 못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영화로 나와도 너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본 작품이었다.


해도연의 『진공 붕괴』속 작품들은 과학적 상상력 속에서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의미, 사랑과 감정, 윤리에 대한 다양한 통찰을 주었다. SF 장르 소설이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질문들이 담겨있다.

그동안 SF 장르는 왠지 유치하거나 터무니없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김초엽 작품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SF 소설-특히 단편소설도 과학 전공자들이 쓰면 이렇게 잘 쓸 수 있구나 싶어 감탄을 하며 읽었다.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과 사유가 담긴 다른 장편소설도 읽어보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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