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는 식물 그림을 그리며 식물을 연구하는 식물학자 '신혜우'님의 에세이다.
신혜우 작가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연구원으로 3년간 지내며, 보고 느끼고 아꼈던 메릴랜드 숲속의 사계절, 열두 달 식물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새삼 아이가 어릴 때 이런저런 식물의 이름들이 궁금해서 식물도감을 사 자주 훑어보곤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식물을 바로 보고 무슨 식물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식물학자를 부러워하기까지 했었다.
식물학자는 어떤 사람일까? 식물학자들은 식물을 보며 어떤 생각들을 할까?
서양배를 먹으면서도 과육의 석세포 이야기를 하고,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리그닌과 큐티클 이야기를 하며, 꽃을 보며 미생물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식물학자들이다.
그럼에도 일 년 열두 달 계절의 변화를 가장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식물학자가 아닐까?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달력이나 시계, 오늘의 날씨보다는 식물을 통해 실감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지금은 봄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하얗게 봉우리 진 목련과, 빨간 열매를 떨구고 피어나는 노란 산수유, 그리고 꽃샘추위 속에서도 하얗게 피어나는 매화를 보며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녹음이 진해지고 나뭇잎 색이 쨍해지면 여름을 느낀다.
낙엽과 단풍을 보면 가을이, 가지마다 쌓인 눈꽃을 보며 한겨울을 실감한다.
계절의 변화에 맞춰 식물들은 각지 제 갈 길을 간다.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를 읽다 보면 그런 식물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마구 느껴진다.
낯선 식물들의 이름이 많아서 자주 검색을 돌려봐야 했지만, 이 또한 책을 읽으며 함께 따라오는 즐거움 중 한 가지였다. 알게 되는 식물의 이름이 늘어날수록, 내가 바라보는 세상 또한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서양에서는 봄의 전령이 난초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들이 꽃 축제를 찾아가듯 서양인들도 여러 꽃 축제를 하는데, 그 첫 꽃축제가 '오키드 쇼'(난초 축제)라고 한다.
신혜우 작가의 주 전공은 난초인 걸까?
그래서인지 책에서는 난초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난이라고 해봐야 꽃 보기는 힘들지만 잎 생김새만으로도 우아함을 뽐내는 동양란과, 화려한 선물용 서양란 정도만 구별하는 나로서는 난초가 다 같은 난초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고, 그리고 식물학자는 그 난초를 다 구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싶은 호기심이 들었다.
작가가 머물던 메릴랜드에는 배꽃이 지고 나면 벚꽃이 핀다.
벚꽃이 머물다 가는 시간은 여기가 거기나 길지 않아, 사람들의 아쉬움이 큰 것 같았다.
여기도 한참 벚꽃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데, 슬프게도 주말에 비 소식이 있다.
오늘 사람들과 함께 비가 오면 이 꽃이 다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 아쉬워했는데.
신혜우 작가는 꽃잎이 떨어지는 것 또한 꽃잎의 소임이니 반갑게 바라보라 말한다.
떨어지는 꽃잎에 아쉬워할 줄만 알았지 그 또한 꽃잎의 소임이라 생각하라는 말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연의 모든 것은 존재의 이유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신비로움이 절묘하게 이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을, 이 글을 읽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꽃잎은 제때 떨어져야 하는 것, 꽃잎이 떨어져야 밑씨가 건강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떨어진 꽃잎이 있어야 땅이 양분 삼아 건강해진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 또한 아쉬워하면 안 된다.
나무는 꽃잎이 떨어진 자리의 상처를 스스로 아물게 하며 자신을 돌본다.
그 또한 마땅히 나무가 해야 할 일이다.
씨앗은 또 어떠한지.
씨앗은 보통 가을에 많이 심는다고 한다.
많은 식물들이 가을에 열매를 맺고 가을에 씨앗을 심는다.
그렇게 땅속에 잠들어 있던 씨앗들은 자신의 때가 다가오면 싹을 틔우고 숲을 깨운다.
아무리 기다리는 자가 재촉해도 더 늦지도 더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때가 되어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떨어진 낙엽은 봄의 꽃,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만큼 관심받지 못한다.
떨어진 나뭇잎은 어디로 가는 걸까?
불과 얼마 전에도 학교 앞 도로에 묵은 낙엽을 포대에 가득 담아 실어가던 시청의 트럭을 보며,
그래 이제 곧 꽃이 필 텐데 묵은 나뭇잎은 어서어서 치워야지 생각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 낙엽들은 어딘가로 보내져 숙성되고 분해되어 비료로 바뀔 것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면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축축한 흙 속 작은 식물과 동물들에게 쓰임을 다했으리라.
사람들의 쏟아지던 관심이 사라진 쓸쓸하고 고요한 순간에도, 식물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튤립도 나무가 있다는 것은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나무 이야기를 통해 자연의 순환과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튤립나무는 죽어 숲을 키우고, 죽은 나무와 꽃잎을 동물과 곤충이 먹는다.
그리고 다시 숲은 튤립나무의 씨앗을 품고 길러준다.
난초는 특정 곰팡이가 있어야 싹을 틔울 수 있다.
그리고 이 곰팡이는 특정 박테리아의 도움이 필요하다.
꽃이 열매를 맺으려면 햇빛과 바람, 동물, 비, 토양이 있어야 한다.
사람과 동물은 또 식물이 있어야 살고, 식물은 태양과 동물이 뱉어낸 이산화탄소가 있어야 한다.
자연은 이렇게 조화를 이룬 채 순환하고 상호작용하고 있다.
식물-자연-인간-우주, 모든 게 연결되고 순환이라는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 너무 아름답다.
일 년간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고, 나무를 바라보고, 떨어지는 나뭇잎과 함께
자연의 이치와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삶, 그리고 인간까지 엮어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이토록 따스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 페이지마다 담겨있다.
이성 풀가동인 요즘 나에게, 감성을 마구 두드리는 순간이다.
그도 결국 숲에 사는 다른 생물과 다를 바 없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되묻는다.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답을 찾고 있다면, 이치대로 살아가는 식물들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답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렇게 일 년 동안 자연을 이야기하는 에세이가 너무 좋다.
단순히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의 흐름 속에 삶의 변화와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매번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도 매번 다른 모습을 사는 우리들처럼,
자연의 순환이라는 큰 흐름 속에 사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한편으로 특별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내 하루가 조금 더 소중해지고, 지금 이 순간을 더욱 깊이 살수 있는 원동력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따뜻한 이 계절에 식물을 좋아한다면 한 번씩 만나보라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