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폴라 일지』는 <대 온실 수리 보고서>의 작가 김금희가 특별취재기자 자격을 부여받고 2024년 2월, 약 한 달간의 남극 세종 기지에서 체류했던 경험을 쓴 책이다. 대부분 과학자들이 가득한 남극 세종 기지에 작가 신분으로는 최초로 방문하여, 소설가의 눈으로 바라본 경이로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남극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끝없이 펼쳐진 하얀 얼음 대륙, 아니 하얗고 투명하다 못해 푸르기까지 한 얼음 세상 속에 생각보다 많은 생명이 숨 쉬고 있다. 펭귄과 갈매기, 바다표범, 고래 정도나 살 것만 같은 혹한 환경에서도 지의류, 이끼뿐 아니라 꽃이 피는 식물이 2종(남극좀새풀, 남극개미자리)이 있다.
잠깐의 여름 동안 남극의 생명들은 인간에게 약간의 틈을 내어주고, 긴 겨우내 무서운 눈 폭풍이 남아있는 생명을 모두 쓸어가버릴 것만 같은 곳에서도 생명이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거대한 빙하, 바다를 떠도는 유빙, 앞이 보이지 않은 무서운 블리자드가 있는 극지.
이곳에 인간은 잠시 머물다가 왔던 그대로 돌아가야 하는 손님일 뿐이다.
자연의 아름다움 말고도 남극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이 아무나 갈 수 없는 특별한 곳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민간인이 자비를 들여 남극과 가까운 나라에서 관광용 크루즈를 타고 남극의 여름인 12월에서 2월에 갈 수는 있다. 하지만 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비행 여정과 크루즈 관광 일정, 기후 상태도 고려해야 하니 시간적 여유도 필요하다. 갈 때는 방한용품도 단단히 준비해 가야 한다.
그렇다 해도 일반인이 세종 기지를 방문할 수는 없다.
남극 세종 기지에는 일 년에 딱 2번 연구 대가 파견된다. 월동연구대와 하계연구대.
과학 연구기지이다 보니 지질학, 생물학, 대기학, 해양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많고, 기상대원, 안전대원, 조리대원, 중장비 및 기계설비 요원 등 특별한 자격조건을 갖춘 자들 중 선발을 거쳐 남극에 갈 수 있다.
보통은 이렇게 구성된 요원들 사이에 최초로 작가가 포함되었다.
작가가 그토록 남극을 가고 싶었던 이유는 '없는 것'을 향한 열망이었다.
인간도 거의 없고, 생물도 많지 않은 곳.
문명도, 주인도, 국경도, 경계도 없는 그저 압도적인 자연만 존재하는 곳에 주어진 만큼 머물고 싶었던 열망이 그를 그곳으로 데려다주었다.
책의 전체적인 맥락은 세종 기지에서의 일상 보고였다. 그곳에서 연구원들을 따라다니며 동식물을 관찰하고, 대기 연구를 위해 풍선을 띄우고, 옆새우와 이끼의 표본을 구하는 일을 보조하기 위해 남극까지 굳이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남극 생활이 너무 궁금한 독자 중 한 명인 나는 이런 일상 보고마저도 너무 재밌게 읽어 내려갔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내용들이라 글만으로는 상상이 잘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는데, 뒤늦게 책 뒤쪽에 작가가 직접 찍은 남극 생활 사진이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글이 설명한 내용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고래뼈 이정표라든지, 옆새우 표본, 인간 윷놀이, 그라운드 서클 같은 것들)
없는 것에 열망과 낯선 투지가 작가를 남극에 데려다주었지만 그녀가 남극 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은 결국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작가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 그리고 작가가 그들과 일상을 만들어나가며 대면한 여러 감정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우리가 누구와 어디에 있든, 우리의 삶을 이루는 본질이 바로 관계와 감정, 그리고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한 번 더 공감했다. 남극에서 돌아온 작가가 딸을 걱정하느라 병이 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마지막 장면을 읽으며, 진짜 중요한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너무나 뻔하지만 울컥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포인트 중 하나였다.
책의 후반에 펭귄들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며 쓴 문장을 통해 작가가 남극에 와서 진짜 얻고자 했던 것을 짐작해 보았다. 그것은 계속 꿈을 꾸고 도전하며 새로운 글을 계속해서 써나갈 수 있는 힘이 아니었을까? 낯선 여행지에서 얻어 가는 삶에 대한 깨달음. 이것이 우리가 여행을 하는 진짜 이유기도 하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이 되고 만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작가의 소중한 남극 이야기를 통해 나 또한 귀한 교훈을 하나 얻어 간다.
남극의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감수성과 인간존재에 대한 사유가 듬뿍 담긴 문장들이 많다. 눈이 쏟아지던 설 연휴 기차 안에서, 너무나 많은 '있음'으로 채워진 공간에서 '없는 것들이 가득한' 남극의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시간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