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며 음식 뒤에 ‘안주’ 자만 붙으면 못 먹을 게 없었다는 권여선 작가의 안주 일체가 궁금하다면 경쾌한 문체에, 음식 앞에서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고집스러운 입맛이 담긴 이 책을 만나보라 하고 싶다.
죽어도 먹기 싫었던 음식이랄지, 먹을 순 있지만 즐겨먹지 않았던 음식들을 어떤 계기로 먹게 되고,
새로운 맛을 발견하게 되는데
작가에게는 그것이 ‘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입맛이라는 것이 다 제각각이기에 누군가는 잘 먹고, 누군가는 못 먹는 음식들이 분명 있다.
나 또한 그랬으니,
기억을 돌이켜보면 20대 이전 친정엄마가 해주시던 음식은 나의 식습관 뿌리를 이루고 있고,
20대 이후 술, 사람들을 통해 배운 음식들이 가지를 쳐 뻗어 나갔다.
이제는 불혹의 나이를 넘기면서는 입맛이라는 게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만 찾게 되고
때로는 고집스럽게 아는 맛만 즐기게 되었으니
그건 아마도 예전만큼 술을 많이 마시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인지, 새로운 사람들을 일부러 찾아 만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확실히 나의 술 메이트는 이제 수많은 지인, 직장동료들에서
단짝 남편과 절친 몇 명으로 반경이 상당히 많이 좁아졌음은 확실하다.
서로의 입맛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고 도전도 시들해졌다.
그래도 지금보다 패기 넘치던 시절, 새로운 음식을 도전할 때 술만큼 좋은 것이 또 있었을까?
나도 술을 마시며 곱창과 홍어를 먹기 시작했고, 멍게, 해삼, 개불을 술안주 삼아 먹기 시작했다.
술을 먹기 위해 안주를 먹는 것인지, 안주를 먹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술안주라는 명분이 없었더라면 새로운 식재료에 도전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혹은 영영 못 먹어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작가가 입에도 대지 않던 순대를 먹기 시작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러한 경험이 어쩌면 인류 공통의 보편적 경험일 수도 있겠다는 발칙한 생각을 하면서 웃게 된다.
애주가 작가가 쓴 ‘술꾼’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이라고 해서 이 책을 그저 술안주 소개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책에서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먹을 것인가를 계절별로 풀어 써 내려가고 있다.
제철 행복에는 제철 놀 거리 못지않게 먹거리 또한 필수인 법.
계절마다 찾아먹어야 하는 제철 음식과 안주들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군침을 쓱 흘리며 '오늘 저녁 뭐 먹나'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추석이 지나고 비가 내린 후 이제야 제법 가을 공기가 느껴지는 이때,
가을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숫게를 한가득 사서 반은 쪄 먹고 반은 가을 무를 송송 썰고,
된장을 살짝 푼 된장찌개를 끓여먹거나 대하를 소금에 구워 먹으며 소주 한 잔 기울이기 좋을 때가 왔다.
그러나 이때 이런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건 누가 가르쳐 준 것일까?
생생정보*(요즘엔 TV를 안 보니 어떤 프로그램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소개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무얼 먹었다더라는 소문이 들려와 맛집에 긴 줄을 서가며 치열하게 먹어야 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큰 건
유년 시절 매 철마다 형편껏 뭐라도 꼭 먹이려고 애쓰셨던 엄마의 식탁이 아니었을까?
추억이 묻은 음식은 강력하다.
심지어 그 음식을 먹을 때 함께 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표정, 그곳의 냄새, 배경까지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살아난다.
이맘때면 주변에서 좋은 꽃게를 사서 간장게장이니 양념게장이니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리지만,
역시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게장은 친정 엄마표 칼칼한 간장 돌게장이다.
비릿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양념이 쏙 스며든 짭짤한 돌게 다리를 쪽쪽 빨아먹을 때의 쾌감은 아는 사람만 안다.
엄마표 깻잎조림과 가지나물, 단호박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소함이 있던 늙은 호박죽,
그리고 손 반죽으로 치대 만든 칼국수 면으로 만든 팥칼국수.
아무리 비슷한 곳을 찾아보려 해도 친정 엄마표 그 맛을 똑같이 재현해 내는 곳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내가 먹은 것이 그저 음식이 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먹었던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부모님의 사랑, 그 이상이 담겨있었다.
술과 안주에 대한 책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책에서 음식 맛보다 사람 맛이 더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는 주로
‘누군가’와 함께 먹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언제’,‘어떻게’ 먹어야 제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제법 진지한 고민들이 함께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길고 지독했던 더위의 끝에서 집 나간 입맛을 찾고 싶은 이들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오늘의 술안주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들에게
시작은 술안주 이야기였지만 끝은 온갖 추억 속 음식들을 소환해 주는 『술꾼들의 모국어』를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음식은 위기와 갈등을 만들기도 하고 화해와 위안을 주기도 한다.
한 식구食口란 음식을 같이 먹는 입 들이니,
함께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나 열정도 중요하지만,
국의 간이나 김치의 맛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식구만 그런 게 아니다. 친구, 선후배, 동료, 친척 등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다.
나는 사람들을 가장 소박한 기쁨으로 결합시키는 요소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 P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