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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사람들님의 서재

막상 지하철역에 내리고 보니 역사가 생각보다 조용했다. 나는 사람들이 줄었나 보다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역사 안에는 몸을 녹이며 조는 사람들과 얼어붙은 얼굴로 숨을 쌕쌕대며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처럼 손에 휴지며 간식거리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도있었다. 사람이 적은 것은 아닌데, 왜 조용하지? 그들이 대부분 혼자였기 때문이다. 일행이 많은 팀도 두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단체가 동원된 것이 아니라 각자 참여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조용할수밖에. 그렇다면 바깥은?

출구를 나서서 나는 깜짝 놀랐다. 끝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참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조용할까? 무대에서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쌀 한 톨도 흘리지 않으려는 모양새로, 사람들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있었다. 광화문에서처럼 온갖 깃발이 휘날렸다. 

문득 앞으로 어린이들은 다양한 깃발이 소리치는 세상에서 살겠구나 싶어 마음 한구석에 불빛이 켜졌다. 어떤 미래는 벌써 와 있었다.
그날 우리는 늦게라도 찾아간 덕에 경찰 버스가 길을 열- P-1
고, 전봉준 투쟁단과 시민들이 남태령 고개를 넘는 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차 빼라!"가 "이겼다!"가 되는 순간에 거기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신식 무기가 없어서 우금치를 넘지 못했지만, 그 정신을 이어받은 전봉준 투쟁단은 남태령을 넘었다. 우리는 행진을 하면서 트랙터나 트럭에서 손을 내민 농민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중노년 여성 농민이 울며 사람들과 악수하는 구간을 지나고는 조금 울었다. 누가 볼까 봐, 조금만 울었다. 

마침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작가의 수상 강연문이 떠올랐다.
과거와 현재,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를 돕고 구원한다는 걸 알았다. 이 연결이 영원하리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남태령을 지킨 사람들은 동학농민군의 과거를 밝히고,
그분들이 구해 주셔서 고개를 넘었다. 
비로소 언어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그건 ‘이야기‘였다. 우리에게 이야기가 있었다. 크고 거칠고, 아름답고 섬세한 역사와 이야기가 남태령에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했다.- P-1
우리에게 언어가 없었다면, 언덕이 광장이 되는 기적적인 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남태령에서 밤을 새우신 분들은 더 외로우셨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단 나는, 일평생 가장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을 경험했다고 여기 적어 둔다.
그다음 광화문 집회에는 나도 팻말을 만들어 들고 갔다.
두꺼운 종이 앞뒤로 "어린이 시민에게 온전한 공화국을" "어린이가 보고 있다 민주 정의 실현하라" 구호를 적었다. 
깃발은 아니지만, 또 쑥스럽기도 했지만, 구호를 외칠 때나 걸어다닐 때 팻말이 잘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광장에 어린이도 왔다는 것, 광장의 결과에 어린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어린이‘라는 낱말을 제일 잘 알아보는 이는 어린이들이다. 기분 탓인지, 주변에 어린이들이 알짱거렸다.
그래서 다음에는 사탕과 초콜릿을 작은 봉투에 담아, 만나는 어린이마다 한 봉지씩 나누어 주었다. 나로서는 굉장히 용기가 필요했는데 광장의 기운으로 눈 딱 감고 했다.
몇몇 어른들은 내게 동의를 구하고 팻말 사진을 찍었다.
조금 특이한 팻말이라는 것이다. 그중 한 분은 국회의원이- P-1
었고, 한 분은 할아버지, 또 한 분은 공공운수노조 점퍼를 입은 분이었다. 특히 노조 분은 정말 놀랐다는 듯이 "이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서......" 하며 다급히 사진을 찍으셨다.
나는 간식 봉지를 드렸다. 그분은 정말 깜짝! 놀라며, 펄쩍!
뛰며 사양하셨다.
"어린이 주려고 가져오셨을 텐데..."
‘애들‘이 아니라 ‘어린이‘라고 하셔서 좋았다.
"어린이한테 관심 있는 어른한테도 드려요"
그러고는 도망쳤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그림책의 ‘언어‘는 그림이다. 
문자는 아니지만 그림책의 그림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글자를 모르는 인간도 그림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림책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림에 이야기가 담겨 있고, 문자를 몰라도 읽을 수 있는 게 바로 그림책이다.
이런 그림책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10년 뒤가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미래에도 그림책은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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