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그 빛을 받은 은희 또한 영지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위로받고 싶었던 사람들이 위로하는 것처럼, 외로웠던 사람들이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나는 언제나 소설쓰기가 깊은 애도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처리하지 못했던 슬픔을 다시 한번 깊이 느끼며 소화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이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속 기억을 끌어내 어떤 애도를 가능하게 할지도 모르리라 희망했다.
<벌새>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붕괴된 성수대교의 모습을 찾아가 두눈으로 바라보는 은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은희와 동시대를 살아갔던 그때의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애도할 수 있는 영화를 비로소 만났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은희에게 이 영화는 결코 잊힐 수 없는 애도의 기억이 될 것이다.- P-1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다양한 역사적 해석의 여지가 있다‘라거나 ‘유대인들의 거짓 주장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많은 이에게 수용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 진실을 분명히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지 간에,
너희와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거야.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테니까.
혹시 누군가 살아 나간다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걸.
아마 의심도 일고 토론도 붙고
역사가들의 연구도 있을 테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그 증거들을 너희와 함께 없애버릴 테니까.
그리고 설령 몇 가지 증거가 남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너희 중 누군가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너희가 얘기하는 사실들이 믿기에는 너무도 끔찍하다고 할 거야.
연합군의 과장된 선전이라고 한 거고 모든 것을 부인하는 우리를 믿겠지.
너희가 아니라. 과거 강제수용소의 역사, 그것을 쓰는 것은 바로 우리가 될
"거야."
실제로 집단 학살의 흔적은 많은 부분 나치에 의해 인멸되었다. 하지만 살아남아 증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 P-1
그는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돌볼 새도 없이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아우슈비츠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던 기억의 세부가 잊힐 위험이 있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바닥까지 짓밟힌 기억을 하나하나 글로 써 내려간다.
그렇게 완성된 책이 이것이 인간인가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은 억압자에게도 피억압자에게도 던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프리모 레비는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라고 말한다. "트라우마를 회상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적어도 피해자의 마음을 심란케 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기억을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가장 끔찍했던 시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무의식적인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아우슈비츠에서의 일을 낱낱이 서술했다.- P-1
안 될 정도로 집단 트라우마의 크기가 크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을 외면하고 더 나아가 부정하기까지 한다면,
고통을 겪은 당사자들의 입을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갈 수 있다.
어쩌면 예전보다도 더 어두운 지점으로
성폭력 생존자이기도 한 철학자 수잔 브라이슨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죄악이 우리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똑바로 바라봐야만 하고 또 알려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가 또는 다른 사람들이 다시 희생자가 되는 일을 막을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를 가장 지치게 만드는 후기억은 침묵에 의해 주입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이야기를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데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이야기 속에 담아 말하는 것,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말하고 다른 이들이 겪은 일들을 듣는 것이다.
이것은 제한된 과거 속에 우리를 구속하는 대신, 자유롭게 상상하는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드러날 수 있게 하는 바탕을 만든다."- P-1
과거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이야기 속에 담아 말하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의 경험을 듣는 것. 그런 일들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감지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낙인을 찍고 경멸하고 조롱하는 정서가 어느 때보다도 만연한 요즘인 것 같다.
프리모 레비는 어떤 사회라도 대화를 포기하고 파시즘으로 흐를 때
언제든 수용소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더 대화해야 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우리가 겪어온 시간에 대해서
말하고 들을 기회가더 많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과거를 바로 세울 때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무책임한 비관주의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