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불가능한 이 세계에서, 무력한 연루자의 신세로,
그저 모든 것을 지켜볼 뿐이다
"왜 야구팬은 이토록 자주, 그리고 유난히 화를 내는 걸까.
이유는 단순하다. 화낼 기회가 많아서다. 그런데도 야구팬은 매일 경기를 본다.
못하면 못한다고 화를 내고, 잘하면 이렇게 잘할 수있으면서 어제는 왜 못했냐고 화를 낸다.
경기는 늘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쏟아낸다. 감독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고, 믿었던선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팀이 아무리 잘해도, 사소한 에러 하나로 경기는 뒤집힌다. 그리고 팬은 온 마음을 쏟아도 경기에 개입할 수 없다.
예측 불가능한 이 세계에서 의미를 붙잡으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럼에도 팬은 경기를 꺼버리지 않는다.
한번 마음을 준 이상,
손바닥 뒤집듯 팀을 바꾸지도 않는다.
절망을 끝까지 지켜보며,
다시 뜰 내일의 태양을 기다린다.
다만, 화를 내면서 말이다."- P-1
나는 야구 규칙을 하나도 몰랐다. 어느 정도로 몰랐냐면, 공격과 수비의 구분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공을 던지는 쪽이 공격이 아니라 수비란 말인가? 몇 해 전의 나처럼 야구를 전혀 모른 채 이 책을 집어 든 독자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저쪽에서 먼저 공을 던졌다면 이쪽에서 방망이로 막아내는 게 수비여야 말이 되지 않나? 이런 혼란은 야구라는 스포츠를 본질적으로 오해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잠시 다른 스포츠를 떠올려보자. 근대 이후 체계화된 스포츠 대부분은 전쟁의 형식을 닮았다. 축구와 농구는 수비망을 뚫고 상대편 골문 (적진의 요새)에 공을 넣는 것이 목적이고, 배구는 공(폭탄)을 우리 진영에 떨어뜨리지 않고 받아넘겨 점수를 올린다. 럭비 역시 공을 들고 달려가 상대 골라인을 넘거나 땅에 공을 내리찍으면(승전국의 깃발을 꽂듯이) 득점한다.
펜싱이나 양궁은 말할 것도 없다. 추상화의 단계를 거치지도 않은, 싸움의 원형에 가까운 스포츠니까.
그런데 야구는 좀 이상하다. 두 팀이 번갈아 공격과 수비를 맡는데, 득점의 핵심은 공을 빠르게 던지는 것도, 방망이로 멋지게 쳐내는 것도 아니다. 규칙은 복잡하지만 목표는 단순하다. 안타를 쳐서 달리- P-1
든,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몰래 도망가든, 어떻게든 최대한 많은 선수가 구장을 한 바퀴 돌아 ‘홈‘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스포츠인가!
야구의 요점을 이해하고 나니 익숙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호메로스가 쓴 고대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아』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섬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다로 나선다. 귀향길은 단순한 항해가 아니었다. 폭풍우와 해류, 유혹과 음모, 신들의 장난과 괴물들의 방해가 끝없이 이어졌다. 순풍이 불어 멀리 나아가는 날도 있었지만온 힘을 다해 노를 저어도 제자리인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동료를 잃어도, 배가 부서져도, 지혜롭게 헤쳐나가 마침내 10년 만에 집으로돌아왔다.
야구도 그런 모험담이다. 전쟁이 아닌 귀환의여정. 타석에 선 아홉 명의 타자는 저마다 한 명의 오디세우스다. 이들의 여정에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지고, 기회를 상실할 때마다 그것을 ‘아웃‘이라 부른다.
그 안에 살아남아 홈으로 돌아오는 것이 목표다.
공을 방망이에 빗맞혀 파울이 나면 타석에서 스- P-1
윙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 마치 바위를 산 정상까지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또, 타격 후 다음 베이스를 향해 달릴 때는 절대 망설이거나 뒤돌아봐선 안 된다. 지하세계에서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올 때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던 오르페우스처럼. 그렇게 한 바퀴 돌아 무사히 홈을 밟으면 1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귀환을 막는 수비진은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을까? 투수는 공을 던지는 사람이다. 골리앗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다윗의 심정으로 전력을 다해 공을 던진다. 다만 표적은 미간이 아니라 스트라이크존이다. 때로는 바다 위의 님프 세이렌처럼,
타자의 눈과 마음을 홀리는 변화구를 던져 전진을 방해한다. 타자가 그 유혹을 뚫고 공을 쳐내면, 아킬레우스처럼 날렵한 야수들이 공을 낚아채려 전속력으로 들판을 누빈다. 아, 이 얼마나 신화적인 스포츠인가!
그렇게 신화를 닮은 순간들이 하나둘 쌓이다 보면 어느새 경기장 전체가 하나의 극장으로 변모한다.
스릴러 영화가 몰입을 유도하듯, 야구도 관객을 긴장의 한가운데로 불러들인다. 다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그것- P-1
이 서스펜스다. 야구만큼 서스펜스가 가득한 스포츠는 드물다. 아니, 경기 자체가 승부가 아니라 긴장감을 위해 설계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투수가 마운드에 선다. 포수와 눈빛을 주고받고, 사인을 교환한다. 고개를 젓는다. 다시 젓는다.
이윽고 마음을 정한다. 주먹을 글러브 속에 숨겼다가, 몸을 비틀며 팔을 뻗어 공을 던지는 그 순간, 관중의 기대와 불안이 최고조에 달한다. 스트라이크일까?
볼일까? 아니면 파울일까? 심판이 수신호로 판정을 내리는 순간, 하나의 고비가 일단락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투수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사이, 우리는 2루 주자가 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 포수가 마스크를 벗어 젖히고 황급히 공을 던진다. 도루는 성공할까? 실패할까? 서스펜스는 다시 이어지고, 관중은 또 한 번 숨을 죽인다. 아, 이 얼마나영화적인 스포츠인가!
야구의 매력을 알게 된 나는 슬슬 프로야구를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중계를 해주는 플랫폼에 접속해, 닥치는 대로 경기를 보며 규칙을 익혔다. 나는 운동신경도 떨어지고 경제관념도 희박하지만 호기심과 집중력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P-1
이긴 걸로 충분해
야구는 시간제한 없이 ‘초‘와 ‘말‘로 나뉜 아홉개의 이닝을 소화하면 끝나는 경기다.
9회 말은 홈팀의 마지막 공격이다. 그런데 9회 초가 끝났을 때 이미 홈팀이 1점이라도 앞서 있다면, 9회 말은 생략된다.
경기를 그대로 끝내버리는 것이다.
두 팀이 공수 교대를 반복하며 점수를 겨루는스포츠 중 이런 규칙을 가진 건 내가 아는 한 야구이다. 이긴 팀 입장에선 점수를 더 낼 기회가 있음에도 그냥 판을 덮는 셈이다.
고스톱으로 치면 손에 좋온 패를 쥐고도 ‘고‘를 외치지 않고 ‘스톱‘하는 것과 같다.
프로야구에서도 득실 차는 순위에 영향을 미친다. 이득을 따진다면 불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는 그 중단을 손해라고 보지 않는다.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대에게서 점수를 더 빼앗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고? 오늘은 이긴 걸로 충분하니까.
당신 손으로 직접
믿음직한 선발투수를 내세워도, 그 어깨에 모든걸 맡길 순 없다. 타자 한 명은 안타를 쳐도 괜찮다. 뒤에 여덟 명이나 대기 중이니까. 하지만 선발투- P-1
수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혼자서 몇 이닝이고 경기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그때 감독은 타이밍을 보고 과감히 교체를 결심해야 한다.
한 이닝이라도 더 던지고 싶어 하는 투수, 조금만 더 믿어주면 상황을 만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투수라도, 현명한 감독이라면 결연히 끌어내려야 한다.
축구장에서는 호루라기 소리와 전광판 안내로 교체가 이루어진다. 야구는 다르다. 감독이나 투수코치가 직접 마운드로 걸어간다. 멀리서 자신을 향해오는 감독을 본 투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지만,
이내 공을 내어준다.
수고했다며 궁둥이를 툭툭 두드려주는 손길. 야구에서 교체는 그렇게, 손으로 직접 이루어진다.
최고의 피아니스트처럼
야구를 잘 몰랐을 땐 타자가 섹시해 보였다.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리 파울이라도 날려 보내면 관중은 탄성을 터뜨린다. 야구의 묘미를 알고 나신 투수의 매력에 취향저격 당했다. 홈런을 맞을까 봐 피하지 않고, 삼구삼진에 영혼을 걸 줄 아는 게 바로 낭만투수다.
그런데 야구를 보면 볼수록 포수만큼 낭만적인- P-1
포지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포수는 경기의 전체 흐름을 읽을 줄 알고, 투수를 다독여줘야 할 타이밍을 안다.
언제나 묵묵히 투수 뒤에 서 있지만, 포수가없다면 투수도 없다.
이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2023년 겨울, 오랜만에 열린 콘서트에서 가수 이소라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크게 동요했다. 이소라 언니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야구에 빠졌다니. 어슴푸레한 무대에서 그는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구가 노래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더라고요. 마치, 제가 어떤 노래를 던져도 이분이 훌륭하게 다 받아주시는 것처럼요."
무대 한쪽에는 그의 오랜 동료, 피아니스트 이승환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도루에 살고 도루에 죽고
나는 늘, 앞섶이든 등판이든 유니폼이 시커먼흙투성이인 선수를 보면 마음이 움직인다.
그런 선수는 삼진을 당해도 1루까지 달린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냥 뛴다. 도루할 때도 대충 하는 법이 없다. 베이-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