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 술에 취한 아빠는 자살한 누나가 있음을 고백한다.
이후 사람들을 만나 내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고모가 있었다고 말하면,
그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궁금했다.
왜 가족의 비밀 이야기 속 주인공은 늘 고모나 이모일까?
<양양>은 양지영과 양주연, 두 이름을 겹쳐 부르는 말이자 ‘익명 속에 머물러 있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작가는 고모의 삶에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지워졌던 양씨 집안의 가계도를 다시 그리고,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경고를
고모를 기억하라"
"이름 없는 여자들을 기억하라
여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하여 여자들의 생을 기억하라"는
초대로 바꾸어 낸다.
양주연의 용감한 초대에 응해 보시기를 권한다. 망각의 형벌이 생동했던 존재를 축하하는 제의로 바뀌는 순간, 무언가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산 자들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이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P-1
아빠에게
2022년.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네요. 고모에 대해 아빠가 처음 말해 줬을 때가 2015년이었는데, 벌써 7년이 지났어요.
돌이켜 보면 7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빠는 30년 이상 다닌 직장에서 멋지게 퇴직하셨고, 저는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네요. 그리고 고모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있고요.
지금까지 고모 친구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요, 거기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어서 아빠에게 먼저 말해 주고 싶었어요.
그건 바로 1975년 고모가 당시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의 집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남자친구가 최초 신고인이었다는 사실이에요. 고모의 친구들 말로는 고모의 남자친구가 고모를 자주 통제하려고 했고, 언젠가부터 고모는 그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어했대요. 고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고모의 죽음을 단순한 자살로만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 뒤 저는 고모의 죽음이 자살이 맞는지, 혹시 타살은 아- P-1
니었을지 알고 싶었지만, 당시 경찰 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까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고모가 그 남자친구와 여러 번 헤어지고 싶어 했고,
그날도 이별을 말하던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에요.
이와 함께, 오늘날에도 이별 과정에서 먼저 이별을 말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 여성들 모두 삶을 포기했기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죽음이라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아빠와 나누고 싶어요.
다큐멘터리 제목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드렸던가요? 제목은 <양양>이에요.
양양은 양지영과 양주연이 만났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양씨 집안의 여자들을 모두 지칭하는 말이기도 해요.
아빠가 2015년, 그날 전화로 저에게 양씨 집안 딸들은 모두 불행했다고 말했던 게 제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고모의 이야기이지만, 또 제 이야기이기도 해요.
<양양>이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저는
1970년대로 돌아가서 고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작- P-1
년 3월경, 집에서 아빠를 인터뷰했을 때 아빠가 고모 이야기를 하면 여전히 가슴이 아리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이 나요.
아빠를 슬프게 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가족의 비밀이 되어 버린 고모의 삶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고모의 입장에서,
고모의목소리로.
언젠가 고모를 만난다고 했을 때
그때 고모의 편이 되어 줄 수 있을지,
고모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을지,
저는 요즘 저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있어요.
이 영화가 거기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아빠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고모를 자신의 생각과 꿈을 갖고서
한 시대를 살아갔던 한 명의 여성이자
우리의 가족으로 기억하고 싶어요.
고모의 삶을 기억하고,
남은 우리들은 그 기억을 응시하면서
각자의 시간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빠의 시간을 응원하며,
주연 올림-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