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독일의 포르노 문학과 영화, 도구에서 SS는 성적 모험주의를 의미하게 되었다. 자유분방한 섹스의 이미저리 대부분에 나치즘의 흔적이 있다.
부츠와 가죽, 체인, 번쩍이는상체 위의 철십자 훈장, 스와스티카, 고깃덩어리를 매달아 두는갈고리, 육중한 오토바이는 가장 은밀하고 잘 팔리는 에로티시즘의 도구다. 섹스숍과 목욕탕, 가죽 의상을 입은 동성애자들이 즐겨 찾는 술집, 성매매 업소에서 사람들은 자기 장비를 꺼내 든다.
하지만 왜일까?성적으로 억압된 사회였던 나치 독일이 왜 성애화된 것일까? 동성애자를 박해했던 정권이 어떻게 게이들을 흥분시키는 것일까?
단서는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성적인 은유를 매우 선호했다는 데 있다.
니체와 바그너처럼 히틀리 역시 리더십을 ‘여성‘대중을 성적으로 지배하는 것, 즉 강간으로 여겼다.
<의지의 승리>에서 군중은 황홀경에 빠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히틀러가 그들을 흥분시키는 것이다.)좌파 운동의 이미저리는 중성적이고 무성적인 경향이 있다.
우파 운동은 아무리 금욕적이고 억압적인 현실을 불러오더라도 성적인 겉모습을 보인다. 확실히 나치즘은 공산주의보다 더
‘섹시‘하다(이긴 나치의 공이라기보다는 성적 상상력의 본질과 한계 때문이다).
물론 SS 제복에 흥분하는 사람이 전부 나치의 만행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나치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어느 정도 안다면 말이다. 그러나 요즘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P160
성적 감정의 조류가 점점 세력을 키우고 있으며, 바로 이 사실이나치즘을 활용한 유희를 성적으로 보이게 한다.
나치즘의 성애화는 남성 동성애자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긴 하지만, 사도마조히즘적 환상과 실천은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이성애자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지난 몇 년간 가장 큰 성적인 비밀은 파트너 교환이 아닌 사도마조히즘이었다.
사도마조히즘과 파시즘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주네는
"파시즘은 연극이다"라고 말했다. 사도마조히즘적 섹슈얼리티도 마찬가지다. 사도마조히즘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성적인 연극에, 섹슈얼리티의 상연에 참여하는 것이다. 연기자뿐만 아니라 전문 의상 제작자와 연출가도 사도마조히즘적 섹스의 고정 회원이- P-1
공적 책임을 지는 권위에 반대하지 않고, 모든 능력주의를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권위를 전부 없애고 싶은 소망은인간 조건에 대한 유치하고 감상적인 환상입니다. 많은 페미니즘레토릭은 역사를 심리학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과 더불어 심리학까지 얄팍하게 만듭니다. (줄리엣 미첼의비판을 참고할 것.)리치는 나의 정신이 "감정의 토대 위에서 더욱 복잡하게 작동하는 것을 간절히 보고 싶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앉아서 글을 쓰는) 곳에서 볼 때, 리치가 원하는 대로 내가 페미니즘에 전념할 수 없는 이유는 그저 복잡성이 갈수록 깊고두터워지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주장의 ‘노선‘이나 ‘올바른‘ 입장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이게 바로 리치가 하는행동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진이 창조한 이미지 세계라는 거대한 주제《뉴욕 리뷰 오브 북스》 에세이)나, 죽음에 대한 고찰과 현재이스라엘 국가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기록(나의 최근 영화인 <약속의 땅>)을 페미니즘의 관심사에 맞게 변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책망을 들을 이유가 있을까요? 두 성별의 탈극화 외에 다른 목표가 존재하고, 성적인 상처 외에 다른 상처가 존재하며, 성적 정체성 외에 다른 정체성이 존재하고, 성 정치 외에 다른 정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고 ‘여성혐오적‘ 가치 외에 다른 ‘반인간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반역이 아닙니다.
리치가 편지 서두에서 칭찬한 내 페미니즘 텍스트까지도,- P-1
내가 글쓰기와 영화 제작에서 페미니즘을 계속 주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평가(하향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 글의 제목은
"당혹스러운" 것이 되었는데, 뜻밖에도 내가 페미니즘 논쟁의 최신유행인 「제4세계 선언」을 모른다는 사실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당혹스러울 것 없습니다. 이 글은 처음에 <미즈Ms.>에 보냈다가 너무길고 난해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그 이후로 이 글을 수락한 《파르티잔리뷰>의 편집자들이 "설문지에 대한 답변"이라는 원래의 내 지루한 제목을 상의 없이 우스꽝스러운 지금의 제목으로 바꾼 것입니다.) 나의 뒤이은 글들이 페미니즘의 주장을 세세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르티잔 리뷰》에 실린 그 글은 "결국 직접 느낀 현실을 예리한정신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 지적인 활동처럼 보이게" 됩니다.
만약 리치가 (일부 여성들만큼 사납지는 않지만) 지성이라는그 무거운 곰을 사냥하려 하는 것이라면, 나는 "지적인 활동"을선호하는 모든 사람을 언제나 열렬히 옹호할 것임을 알려야 할 것같습니다. 진실에는 온갖 종류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 글을 읽고 그 안에서 개인적이고 심지어 자전적인 특성을 놓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나는 그 글이 나의 진실한 감정을 비롯한 그 어떤것의 표현도 아닌 주장으로 여겨지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내가 늘 존경하는 시인이자 분노의 현상학자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성적인 삶을 (권위 개념과 함께 "가부장제의 역사"라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데 급급한 자칭 급진 페미니스트들보다 신- P-1
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의를 담아서 쓴 편지는 페미니즘 레토릭의 계속되는 몰지각함, 즉 반지성주의를 드러냅니다.
리치는 "손택이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말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신("지적인 활동")과 감정("직접느낀 현실" 사이에서 불쾌하고 위험한 대립을 조장하는 페미니즘진영과는 거리를 둡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주장이 다양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열정과 더불어 신중함과 객관성에도 정당한 자격을 부여하는) 지성의 규범적 미덕을 이런 식으로 따분하게 폄하하는 것 역시 파시즘의 뿌리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리펜슈탈에 관한 주장에서 내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겁니다.- P-1
세이에서 탐구했고 몇 년 뒤 발터 베냐민이 파시즘을 정치 생활의미화로 묘사하며 요약했었지요.
미학이 곧 정치라고, 아니면 미학은 결국 정치가 된다고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어떤 미학이요? 어떤 정치요?
내가 생각하기에 ‘파시즘 미학‘을 이해하는 열쇠는 ‘공산주의미학‘이 모순적인 표현임을 이해하는 거예요. 공산주의 국가가 선전하는 예술의 평범성과 진부함을 이해하는 것이죠.
만약 소련과 중국의 공식 예술이 고루하지 않다면,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예술은 파시즘적일 겁니다.
철저히 교훈적인 이상적 공산주의 사회와 달리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단체가 학교가 됩니다) 파시즘적 이상은일종의 국가적 총체예술에 전 국민을 동원합니다. 사회 전체를 연극으로 만드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미학이 정치가 되는 가장 심오한 방식입니다. 이때 미학은 거짓의 정치가 됩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물을 아름답게 경험한다는 것은 그것을 잘못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19세기에 니체와 와일드처럼 도발적으로 가치를 재평가한 이론가들은 ‘미학적 세계관‘을 상세히 해설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미학적 세계관의 우월함 중 하나는, 이것이 정치를 넘어선 가장 관대하고 대범한 관점이자 품위의한 형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파시즘이 전개되면서 그들이 틀렸음이 드러났습니다.
밝혀진 것처럼, ‘미학적 세계관‘은 파시즘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여러 미개한 개념과 분열적갈망에 극도로 우호적이었고, 이런 개념과 갈망은 우리 소비문화- P184
에서도 널리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사례에서 명백히 드러났듯이, 진지한 공산주의 사회의 도덕주의는 미학의 자율성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현대적 의미에서) 예술작품의 생산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1973년에 6주간 중국에 다녀온 뒤로 확신하게 된 것은, 물론 그전에도 알았지만, 지성에 필수적인 자양분으로서 미학의 자율성을 보호하고 소중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급진주의가 거침없이 ‘스타일‘로 전환되던 1960년대를 거치면서, 미학적 세계관을 지나치게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예술작품이 예술작품으로서 그 무엇도 옹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예술작품도 오로지 예술작품만은 아니기에, 현실은 대개 더 복잡합니다. 「스타일에 관하여」에서 나는 와일드와 오르테가가 드러낸 진실을 재구성해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발적인 서문을 통해 속물주의를 비판했고,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예술의 비인간화에서 이와 같은 비판을 더욱 엄숙하게 과장했지요. 그러나 나는 와일드와 오르테가처럼 미학적 반응과 도덕적반응을 암암리에 분리하거나 실제로 대립시키지는 않으려 했습니다.
「스타일에 관하여」를 쓰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같은 입장에서 글을 씁니다. 그러나 지금 내 뼈에는 역사적 살이 더 붙었어요. 나는 여전히 지독한 탐미주의자이자 강박적인 도덕주의자이지만, 역사적 맥락을 더욱 밀도 있게 이해하지 않고 탐미주의자-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