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바람직한 사람 스코트
스코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무지한 대학 총장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났으며, 분별없는 몇몇 정치가들 때문에 선동죄로몰려 감옥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삼류 문명은 그 사람이 지넌 참된 가치와 불굴의 현신성을 모르고 있다.
H. L. 멘켄, 아메리칸 머큐리, 1929주
어린 시절부터 스코트는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동정을 보였다. 상류층의 아들로 태어난 그 사람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은 빚을 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때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펜실베이니아 지방의 광산에서일한 적이 있는데, 노동력의 일부를 메꾸기 위해 고용된 핀란드와 헝가리 이민 출신 광부들 속에서 가난을 목격했다. 그 환경을 속속들이 살피고 거기에서 얻은 지식으로 스코트는 대학교수가 되자 노동 문제에 대해,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엄청난 급여 차이와 생활 조건의 차이에 대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20대였던 1905년 초기에 스코트는 자유주의적 개혁에 관한 공개 강연을 했는데, 이것이 그 사람이 한사회 봉사의 시작이었다.
스코트는 초기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제학 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근대사회에 생겨난 부자와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엄청난 불평등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자는
부와 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회를 누립니다. 가난한 사람들은불행, 과로, 지저분한 환경에 짓눌립니다. 부자는 기회의 천국에서살고 있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의 지옥에 빠져 있으며, 부자의천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지옥을 딛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연구하기 전부터 이러한 상황에 충격을 받고 있었지만, 막상 주의깊게 검토를 해보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가난에 대해 들었고, 불행과 악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 지역의 모든 마을과 도시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능력과 재능의 싹이 눌려 있었습니다. 진보의 가능성과 함께 폭넓은 기회가 마련될 수 있고, 투표소에 같이 가서 10년 안에 상황을 개혁할수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정미소와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들의 노동 상황에대한 조사는 스코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 사람은 여가와 학식이 있는 교육자로서 세상에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고 그것을 말해야만했다. 스코트는 입법과 여론으로 아동노동의 폐해를 줄이거나 없애기위한 길을 찾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아동노동위원회에 참여했다.
스코트가 이 문제를 공론화하자, 특히 그 사람이 가르치고 있던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이사이자 저명한 펜실베이니아 사람인 조지 와톤 페퍼와 레버링 존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그들은 이단적 의견을 내보이며 반대파로 나선 이 젊은 교수를 자기들 권위에 대한 장애물로 결정하여 1915년 6월 16일 즉결처분하듯 대학에서 내쫓았다.
스코트가 9년 동안 몸담았던 교수직에서 갑자기 해직된 사건은 학계를 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언론, 학생회, 교수들이 들고일어나스코트를 옹호했다. 한 학생은 "그분은 대학이 교수에게 기대하는 의무를 진정으로 실천한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며, 대학인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교수는 천금의 가치
가 있는 소중한 사람이다"고 항의했다. 한 동료 교수는 "여기 학장과 교수들이 재임용을 추천했으며, 그들이 보건대 업무처리 능력, 성실성,
•효과있는 교수법과 학교에 대한 충실성에서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한교수가 있다. 이사회가 미리 알리지도 않고 학기가 끝날 무렵 그의 교수직을 박탈한 것은 합법성이 의심스럽다. 아니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관례에 어긋나고 부당한 것이다."고 썼다. 사이몬 페턴(S. Patten)은 경제학 부문에서 스코트의 탁월함을 이렇게 증언한다. "내 생각에 니어링박사를 잃는 것은 최고의 재질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가장 많은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고, 대학인으로서 선과 도덕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온 사람을 대학이 잃는 것이다."
이사회는 완고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스코트의 장래는 끝났다. 그 사람은 지나치게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기존 제도와 권력을 비판함으로써추방되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해직된 뒤, 이 나라의 주요 기관어디에서도 그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작은 도시에 세워진 겉보기에 꽤 자유주의적인 톨레도 대학에서 1916년에 교수직을제안했다.
스코트는 아내와 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오하이오로 가서 전쟁의 먹구름이 낄 때까지 짧게 2년 동안 정치학 교수이자 예술과학대 학장으로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스코트는 전쟁에 반대하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폭력과 무력 충돌이 생명과사회의 부를 끔찍하게 손상시키며,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방안 가운데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전쟁이란 ‘문명 국가들이조직적으로 저지르는 파괴와 대량 학살이자,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벌이는 힘겨루기‘ 라고 보았다. 그 사람은 당연히 글을 쓰고 강연에 나섰다.
나라가 전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공언한 윌슨 대통령 하의미국이 영국편이 되어 참전하자, 스코트 니어링은 톨레도의 애국자들에
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1917년이 되자 그 사람은 톨레도의고등교육기관에서 더 이상 있을 수가 없게 됐다. 스코트의 평판은 이제산산조각이 나버렸으며, 40세도 채 안 되었는데 다시는 미국의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생활에 대해 스코트는다음과 같은 쓰라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람은 대중의 생활 습관, 도덕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규범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자신의 규범에 따라 살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에 반대되는 사회에 대항하여 거슬러나아갈 것인가? 아니면무저항의 길을 따를 것인가? 지난 교수생활 1년은 최고의 시간들이었으며, 가장 행복하고 값진 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은 인간적인 친교와 아울러 든든한 연대의 끈을 맺게 해준 나날들이었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만족스러운 시간들이어서 나는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조금의 후회도 없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더 잘 이해하고 그래서더 사랑한 그 세계의 문은 닫혔으며, 영원히 열리는 일이 없을 거라고생각한다."
1922년 뉴욕 콜지에 기고한 글에서 스코트는 이렇게 썼다.
"이상적인 삶은 어떤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그 이상이 관례에서 멀어질수록,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당신의 이상이정신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며, 정직하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면,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 의식주마저 희생할 수 있다."
뉴욕 콜지의 또 다른 기고문에서는 이렇게 썼다.
"혼자 떨어져 사는 은둔자가 반드시 순교자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삶의 이런 방식과 저런 방식 중에서 선택한 삶의 방식, 그 자신의 길을 따라가면서 거기에서 통행료를 내는 것이다."
스코트의 자료에 들어 있는 카드 가운데 손으로 쓴 기록 하나를 여기 인용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창조와 개혁에 대해 언제나 조심스럽고 망설이•며,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개혁자, 이미 알려진 길을 벗어나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고 끊임없는 반대와 비난질시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창조적 사고와 행위에 따르는 희열에 대헤 그가 치러야 하는 대가의 일부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여러 해 동안 해온 고용살이를 그만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기패거리에게 일자리를 주는 신사들과 내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스코트는 자기 신념을 따름으로써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아주 잘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교수직, 곧 날마다 학생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돕는 일을 잃어버린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청중들을 상대로 하는 강연은 결코 그 허전함을 메꾸지 못했다. 캐나다의 교육자 데이비드 스즈키(D. Suzuki)는 1987년에 쓴 책 《변형 Metamorphosi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강연에는 친밀감이 없다. 생각을 나눈다기보다는 일종의 공연이다.
사상을 주고받는 것, 열린 토론과 관용은 대학 생활의 초석이다.
대학 과정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인격을 구체화한다. 그 속에는 교수의학식, 연구성과와 성찰의 정수가 들어 있다. 강의실에서 교수를 만날때마다 학생들은 순수하게 개인의 선물이라 할 사상을 나누어 받는다."
스코트는 늘 헌신과 봉사. 책임있는 삶을 살려고 했고 자기를 과시하거나 크게 드러내 보이는 생활은 피해왔기 때문에, 해직되었다고 해서심한 혼란을 겪지는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질문을 받았다. "페리클레스, 당신은 그 소식을
"대다수 사람들은 창조와 개혁에 대해 언제나 조심스럽고 망설이•며,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개혁자, 이미 알려진 길을 벗어나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고 끊임없는 반대와 비난,
질시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창조적 사고와 행위에 따르는 희열에 대해 그가 치러야 하는 대가의 일부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여러 해 동안 해온 고용살이를 그만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기패거리에게 일자리를 주는 신사들과 내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스코트는 자기 신념을 따름으로써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아주 잘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교수직, 곧 날마다 학생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돕는 일을 잃어버린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청중들을 상대로 하는 강연은 결코 그 허전함을 메꾸지 못했다. 캐나다의 교육자 데이비드 스즈키(D. Suzuki)는 1987년에 쓴 책 《변형 Metamorphosi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강연에는 친밀감이 없다. 생각을 나눈다기보다는 일종의 공연이다.
사상을 주고받는 것, 열린 토론과 관용은 대학 생활의 초석이다.
•대학 과정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인격을 구체화한다. 그 속에는 교수의학식, 연구성과와 성찰의 정수가 들어 있다. 강의실에서 교수를 만날때마다 학생들은 순수하게 개인의 선물이라 할 사상을 나누어 받는다."
스코트는 늘 헌신과 봉사, 책임있는 삶을 살려고 했고 자기를 과시하거나 크게 드러내 보이는 생활은 피해왔기 때문에, 해직되었다고 해서심한 혼란을 겪지는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질문을 받았다. "페리클레스, 당신은 그 소식을
듣고서도 어떻게 그렇게 담담합니까?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겁니까?
"아니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닙니다." 페리클레스가 대답했다. "만약내가 일생을 두고 추구해온 삶의 지침이 역경 속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는 한순간도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는데 이제 흔들리면 나는 헛수고를 한 셈입니다."
스코트는 청중 수가 수백 수천에서 열두어 명까지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독자층도 끊어져 거의 없어졌다. 그 사람은 평정을 유지했으며,
흔들림없이 일했다. 이름과 명성은 희미해졌지만, 그 사람은 실망하지않고 창조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스코트의 자료철 속에 있는 종이 쪽지에 다음과 같이 연필로 쓴 메모가 두 개 있다.
"(1908년 10월 20일) 속된 삶-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성공하고 유명해진다. 양심을 지키는 삶-소명에 따라 행동하고 두려움이 없으며정의롭게 된다. 성공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유명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반면, 정의로움은 영원한 진리의 반석이 된다."
대중에게 널리 읽힌 저마다의 것 Everybody‘s》에서 따온 이 구절은그 사람의 좌우명 가운데 하나였던 것처럼 보이는데, 초기 수십 년 동안좌우명 맨 앞머리에 되풀이해서 쓰였다.
1911년 자기 앞으로 쓴 비슷한 내용의 이런 기록도 있다.
"네가 일을 시작할 때 다음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곧사람은 경제적인 상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 문제는 이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느냐이다."
다음은 같은 시기에 쓴 좌우명이다.
"간소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 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침것. 계급투쟁 운동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스코트는 빅토리아 시대의 페미니스트이자 작가이며 개혁주의자인올리브 쉬라이너(O, Schreiner)의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 회고록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지적인 완성에 도움이 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교훈을 젊은 시절에 마음에 새겨두는 것은 유익한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품은 사람은 그의 세대에서는 결코성공하기 어렵다. 하지만 홀로 된다고 해서 후회하는 법이 없다."
1917년 스코트는 ‘내 삶의 전환점‘ 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1. 나는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가 되겠다.
2. 나는 사교춤과 야회복을 포기하며 이것들로 대표되는 생활을 멀리하겠다.
3. 나는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 애쓰는 성공적인 강연자 노릇을 포기하겠다. 윌리엄 하드가 나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두세 가지 그럴듯한 보기를 들어 주제를 설명한 다음,
극적인 몸짓을 써서 끝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기대하며 돌아오기 마련이다."
4. 나는 사회복지, 공동의 가치, 공동선을 드높이는 일에 헌신하겠다.
스코트가 쓴 글에 다음 위인들을 모범으로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톨스토이와 자기 포기
소크라테스와 이성의 법칙
소로와 간소한 생활
마르크스, 엥겔스와 착취에 대한 저항
간디와 비폭력
부처와 무애
빅토르 위고와 인도주의
예수와 사회 봉사
공자와 중도
리처드 버크와 우주의식
월트 휘트먼과 자연주의
에드워드 벨라미와 유토피아
올리브 쉬라이너와 풍자
스코트는 자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 L. Stevenson)의 다음과같은 말을 인용하곤 했다.
"희망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나으며,
가장 위대한 성공은 일하는 것이다."
카드에 기록되어 있는 아래 문장은 인용 표시가 없는 걸로 보아서 스코트 자신의 생각일지 모르겠다.
만약 당신의 삶이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더 높이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스코트는 웰즈(H. G. Wells)의 말을 인용하여 덧붙였다. "그렇다. 내가 성취해야 할 것이 바로 실패였다.").
군중보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면 지도자가 된다. 두 발짝 앞서면 방해꾼이 된다. 세 발짝 나가면 미친 사람으로 의심을 받는다.
자신의 가치 기준을 세우고, 스스로 판단한 데 따른 결과를 참는 사람들은 그런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진다.
이 글을 썼을 때 스코트는 34세였다. 그 사람은 매우 건강했으며, 거의 어느 곳 어떤 모임의 학생들에게도 직업적인 교수로서 가르칠 준비와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스스로 자립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돕는다‘는 그 나름의 생활 철학을 펼쳐보일 기회를 빼앗겼다.
스코트는 학계에서 떨어져나왔으며, 그 경력은 쓸모없게 되었다. 그사람에게는 부양가족으로 아내와 아들 둘이 있었다. 1908년 초기까지스코트는 12권의 책을 썼는데, 모두 이름있는 출판사에서 펴냈으며, 공립학교 교과서로도 쓰였다. 이제 이 책들은 시장과 학교 서가에서 거두어들여졌다. 더 이상 이 책들에서 오는 인세수입은 없었다. 젊은 전직교수에게는 어려운 시기였다. 창창하고 부족함이 없고 운이 좋으며 홍.
미로워 보이던 앞으로의 생활이 모호해졌다.
뒤에 데일리 워커 지가 신랄하게 평한 것처럼 운명, 자신의 성품, 행동이 손을 잡아 그 사람을 ‘역사의 쓰레기더미‘ 속에 던져넣었다. 그이는 수련을 거친 데다가 타고난 능력으로 교수직이 적성에 잘 맞았기에평생 교수로 지낼 수도 있었으련만, 제도권에서 그런 투사 같은 교육자는 설 땅이 없었다. 이런 홀로서기 시절에, 스코트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회의‘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지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전국에 회원이 80만 명에 이르렀다. 이 단체는 본래 미국의 참전을 막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한 후에는 그 목표를 바꾸어 전투가 아닌 평화 협정을 촉구했다.
1917년 《거대한 광기 The Great Madness>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스코트는 겉으로 내세우는 이상주의가 아니라 상업주의가 전쟁의 원인과 목표라고 분석했다. 이 과감한 주장으로 정부는 그 사람을 군대 소집과 모병을 방해했다는 죄목을 걸어 연방법원에 기소했다. 국내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보도했다. 스코트는 연방 대배심 앞에서 자신의 소책자
를 근거로 한 문장 한 문장 자기 생각을 펴나가면서 자신의 사건을 변호했다. 배심원들은 정당하게 심리하여 반역죄에 무죄 평결을 내려 그 사람을 석방했으나, 책을 출판하고 돌린 랜드 스쿨 출판사에는 벌금을 물렸다. (배심원에게 한 스코트의 연설문을 포함한 모든 소송기록이 1917년 랜드 스쿨 출판사에서 나왔다. 배심원에게 한 스코트의 연설문은<스코트 니어링 선집 A Scott Nearing Reader>- 스티븐 셔만이 편집하고 헬렌 니어링이 서문을 썼으며 뮤첸이 스케어크로우 출판사에서 펴냈다에 다시 실렸다.)무죄 석방된 날, 스코트는 법정을 나가 복도에 있는 전화로 어머니에게 자기가 감옥에 가지 않게 되었다고 알렸다(당시 법원은 전쟁반대자에게 24년 형을 선고했다). 한 방청객이 강한 아일랜드 억양으로 그 사람에게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같은 분들이 안 계셨더라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쇠고랑을 찰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석방은 되었지만, 스코트의 이름은 이제 말썽쟁이로 전국에 알려지고평판이 나빠져서 더 이상 어디에서고 가르칠 희망이 없게 되었다. 너무나 거리낌없이 생각을 드러냈기 때문에 기성제도에 위협이 되었다. 대학에서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코트는 순회 강연을 나서서 가르치려고 했다. 그 사람은 어디서든 요청하면 강연을 받아들였다. 강연료를주지 않아도 가려고 했고, 스스로 비용을 부담하는 일도 잦았다. 그 사람은 돈을 위해 말하지 않았으며, 가르치기 위해 말했다. 그의 강연은언제나 사실에 바탕을 둔 실천에 대한 것이었다. <어느 변혁가의 성장》에서 그 사람은 이렇게 썼다.
1917-18년 전쟁이 시작되자, 나는 강연 속에 일부러 어떤 식으로든 가벼•운 내용이나 우스갯소리를 넣는 것을 그만두었다. 나는 ‘청중에게 재미를
•주는 성공적인 강연자‘이기를 멈추었다. 나는 연단에 올라가 될 수 있는 한분명한 방법으로 내 자료를 보여주고 내가 해야 할 말을 했으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다. 나는 더 이상 청중과 강연 후원단체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않았다. 강연을 할 때마다 먼저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강연일지 모른다.‘ 그러고 나서 앞으로 나가 결과가 어찌 되든 하고 싶은말을 했다. 곳곳에서 첫번째 강연이 마지막이 되었다. 예를 들면 뉴욕의 쿠퍼 노동조합에서 열린 강연에서 전쟁과 혁명에 대해 청중을 흥분시키는 말을 했다. 조합은 두 번 다시 나를 초청하지 않았다.
해가 감에 따라 스코트는 계속 써나갔지만, 더 이상 유명 출판사나 상업성 있는 출판사를 찾지 못하고, 중소 출판업자에게 맡기거나 자기 돈으로 책을 만들어 자기가 배포해야 했다. 더 이상 잡지 기고나 서평을받지 못했고 책이 서점에 진열되는 일도 없었다. 여론의 악영향으로 유력한 세 일간지인 뉴욕 타임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데일리 워커지가 그 사람의 책에 대한 유료 광고를 거절했다.
스코트는 오직 혼자였으며, 최악의 상황에 있었다. 어떤 학교, 어떤모임, 어떤 단체와 기관도 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또한 아무도그이가 그리는 상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윽고 그 사람은 아내와 가족에게서도 떨어져나왔다. 가족 관계가 깨지자, 모든 재산을 가족에게 넘겨주고 약간의 현금과 생명보험 증권만을 가진 채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그 사람은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내가 스코트를 만났을 때, 그이는 삶의 맨 밑바닥에 있었다.
이것은 허바드가 1908년 쓴 <건강과 부》에서 보인 의견과 아주 일치한다.
"이 세상에서 정말 가치있는 것을 얻게 해주고,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더 보태거나 더 낫게 할 수 없는 세 가지 습관이 있다. 그것은 일하는 습관, 건강을 관리하는 습관, 공부하는 습관이다. 당신이 만약 남자이고 이러한 습관을 가진 데다 같은 습관을 가진 여자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여기에서 천국에 있는 것이며, 여자 쪽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생글거리는 회색 눈을 보고 나는 이 여섯 살 먹은 아이의 삶이 다음 세 가치요소에 따라 형성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첫째, 부모에게서 받은 유전자철,
둘째, 가정과 사회, 학교, 놀이터와 일터에서의 태도,
셋째, 자신의영혼에서 이루어지는 결단
아버지와 어머니들, 당신들이 한 일이 무엇인가? 사회는 그 아이를 일으켜 세울 것인가 아니면 주저앉힐 것인가?
아이야, 너는 어떤 길을 가겠느나?
이 일을 잘 생각하거라. 왜냐하면 네 대답에 따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있으니까.
글쓰기: 노인의 유산‘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료모음 메모에서 스코트는 존에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썼다.
어린 너는 나이먹은 우리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너희들을 통해 얼마나 우리의 죄와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갈망하는지, 비틀리고 우리가 헛되이 쓴삶을 충족시키려고 얼마나 갈망하는지 알 리가 없겠지.
우리는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너희들을 눈여겨보고 있다.
우리의 소견이 좁을수록 무언가 너희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지. 우리는 너희들의 좌절에 고통스러워하고 승리에 기뻐한다.
아마도 그런 경험은 자식을 대하는 부모와 손주들을 대하는 조부모의 경우에 가장 두드러질 것이다. 동시에 진정한 교사나 조언자라면 누구나 자기 보호 아래 있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온힘을 기울이도록 끊임없이 애쓰는 법이다.
나와 우리 부모님의 관계는, 나하고 스코트의 관계 때문에 부모님이 얼마 동안 한탄하던 때를 빼고는 변함없이 따뜻하고 가까웠다.
1940년대에 나는 마침내 부모님을 설득해 그분들이 살고 있는 쾌적한 플로리다의 대학 마을에서 이곳으로 올라와 여름철을 몇 번 보내도록 할 수 있
연해달라고 부탁했소. 나는 10명이나 12명의 학생들을 기대했는데, 가서보니 대략 250명의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소. 나는 앞으로 나가 예정된강연을 시작하여 15분 동안 강연하고 40분간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소, 나는 칠판에 이렇게 썼소.
지배계층의 프로젝트 ‘착취‘
기술1. 물건 축적2. 마약 제조3. 속임수
결과1. 지배 계급에 종속2. 망각3. 타락과 붕괴
이것과 반대편에는 이렇게 썼소.
자유론자의 반(反) 프로젝트 ‘해방‘
기술1. 검약 2. 금욕주의3. 목표 설정
결과 1.자립 2. 에너지 보존3. 성장
나는 학생들에게 ‘지배계층의 프로젝트‘는 오늘날 추하고 저급하며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제도에서 쓰는 방식이라고 말했소. 그리고 유일하고 진정한 자유는 욕구를 최대한 줄이는 데 있다고 말했소. 학생들의 반응은 격렬했소. 그 학생들은 맥주와 담배, 안락을 결코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소
연대 활동과 스스로 하는 훈련에 참가하는 것이 다음 단계를 위해 필요한 것인데도 그 학생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소. 아무도 공동의 목표를 받아들일 능력이 없음이 분명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