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복있는사람들님의 서재

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하는 우리 두 사람

저 가을 산을어떻게 혼자 넘나우리 둘이서도그렇게 힘들었는데.
중국, 7세기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고... 다른 방, 다른 곳에서 다른사건이 일어난다. 우리 삶에는 열리고 닫히는 많은 문들이 있다. 어떤 문들은 조금 열어둔 채 떠난다. 다시 돌아올 희망과 포부를 안고. 또 어떤 문들은 쾅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닫히고 만다. "더 이상은안 돼!" 하며, 어떤 문들은 "괜찮았어, 하지만 끝난 일이야" 하며 후회속에서 조용히 닫힌다. 떠남은 다른 곳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문을 닫고서 그 문을 뒤로하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전망과 모험, 새로운 가능성과 동기를 일으키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53년 동안 함께 살았던 스코트가 만 100세가 된 지 3주일 뒤에 메인에 있는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날 하나의 장이 막을 내렸지만,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이와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 그이는 오랫동안 최선의 삶을 살았고, 일부러 음식을 끊음으로써 위엄을 잃지 않은 채삶을 마쳤다. 나는 느슨하게 그의 손에 마지막까지 쥐어져 있던 고삐를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내 삶을 꾸려갈 수 있다. 나는 의기소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알고 있다. ‘우리 머리 위로 새가 슬퍼하며 날아다닌다고 해서 우리 머리에 새 둥지를 틀게 할 필요는 없다‘는 고대 중국의 격언이 생각난다.
나는 스코트가 아직 여기에 있는 것처럼 살려고 애쓸 것이다. 그이는 우리 집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보물창고였다. 그이와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안정되었다. 이제 나 혼자가 되었으니 내 스스로모든 일, 모든 사람과 마주해야 한다. 새뮤얼 존슨(S. Johnson)은 1780년에 아내와 사별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민을 담아 다음과 같이썼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상대방을 잃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사랑한 아내를 잃고 뒤에 남은 사람은 희망과 걱정, 관심사를같이했던 유일한 존재가 그리고 많은 고락을 나누며 지나온 날들을함께 돌아보고 앞날을 함께 그려본 유일한 반려자가 떨어져나갔음을봅니다. 삶의 연속성이 상처받고, 감정의 안정이 멈추며, 외부의 자극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때까지 삶의 흐름이 중단되고 움직임이 둔해집니다. 그 중단된 시간은 끔찍합니다."
스코트가 떠난 뒤 몇 달은 내 정신에서 축복받은 공백의 시기였다. 친구들은 내가 규칙을 지키면서 겉으로 보아 명랑하게 모든 일상 활동을해나가려 했다고 말하지만, 아마도 내게서 어떤 거리감과 관심이 옅어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찾아오는 친구들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루이스(C. S. Lewis)는 <눈에 보이는 비통함 A Grief Observed》에서이렇게 썼다.
"잃음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에 뒤따라오기 마련인 한 부분이다.
결혼이 구혼에 뒤따르듯, 가을이 여름 뒤에 오듯 사별은 결혼에 이어서 온다. 잃는다는 것은 단절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국면이며, 춤
의 중단이 아니라 그 다음 차례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을 때그 사람 손에 이끌려 우리는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앞에 남아 있도록 배워야 하는 것이 이 춤의 슬픈 장면이다."
나는 나보다 스물한 살이 많은 스코트가 먼저 갈 가능성이 많다고는알고 있었지만, 거의 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지내왔다. 스코트는 매우건강하고 힘차게 활동했으며 삶에 충실했으므로, 언제나 그렇게 살아갈것만 같았다. 나는 무대 밖으로 사라진 그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때가 되었고, 그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떠나갔다. 이제 그이는 더 이상 농장에서 일하지 않고, 트럭 안으로 해초를 던져넣지 않는다. 저녁마다 벽난로 옆에서 함께 소리내어 책을 읽을 수도없고, 여행도 떠나지 못하며, 책을 쓰거나 세상사에 대해 설득력있는논평도 하지 못한다. 그이는 나보다 조금 앞서 우리의 조화로운 관계 밖으로 떠나갔다.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 동안 물건을 정리하고 집안일, 책, 원고, 농장에 관한 일들을 적절하게 결정하여 정리한 뒤 나 또한 홀로 떠날 것이다. 나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사실 이제 떠난다고 해서 결코 이르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특별히 운이 좋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왔으며, 이제 나날이 되풀이되는 자질구레한 일에서 빠르게 떨어져나가고 있다. 만일 저 반짝이는 바다가 가라앉게 된다면, 나는 기쁘게 내몸을 그 속에 잠글 것이다. 그리고 저 너머 도달한 곳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있다면, 나는 잠깐 숨을 쉬고 주위를 돌아본 뒤에 기꺼이 그 일과맞닥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앞으로 남은 삶의 열쇠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 나는 우리가 가기로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으며 평화롭고 고요한 가운데 위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코
트가 그랬듯이 음식 먹는 일을 멈출 수 있다. 죽음이 우리의 목적이라한다면, 음식은 우리를 육체에 매이게 하는 미끼요 독이다. 육체에 음식물 공급을 멈추면, 육체는 기울어져 죽음에 이른다. 죽음은 삶의 모힘을 끝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육체가 끝나는 것일 뿐이다.
간디는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면 할수록 헤어짐에서 오는 슬픔이 아마도가장 큰 망상이라고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망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가 친구들을 사랑하게되는 것은 그들 속에서 우리가 보는 실체 때문인데도, 우리는 잠깐 동안 그 실체를 덮고 있던 껍데기가 사라지는 것을 한탄합니다. 실체의죽음, 실체와 이별하는 일은 없습니다. 진실한 우정은 겉껍질이 사라진 뒤에도 그 실체를 만나고 지켜갑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은 1세기에 티아나(Tyana)의 아폴로니우스(Apolonius)가 남긴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말고는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본질에서 자연계로 건너가는 것은 탄생이요, 자연계에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 창조되거나 사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눈에 보이거나 안 보이게 될 뿐이다."
스코트는 언젠가 죽은 뒤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친구의 질문에 이렇게 답장을 쓴 일이 있다.
"나는 다르게 묻고 싶네. 사람은 그가 속해 있는 우주와 계속해서관계를 유지해가는가? 내가 이르게 된 결론은 삶이 본질에서 아주 다른 경험의 영역으로 옮겨간다는 것일세. 삶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합적인 것이고, 그 복합적인 것의 하나는 삶이 길거나 짧은 지속기간을 갖는 여러 조각들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네. 그리고 어떤 조각의 삶이든 이 땅에서 우리 삶을 이어가도록 해주는 몸의 기관보다는 영속
적이라네."
우리 삶에는 너무 많은 ‘나‘가 있다. 저마다의 인격은 우리의 본체가아니라 우리가 걸치고 있는 무엇이다. 우리 몸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다. 우리 생각 또한 우리가 아니다. 우리생각에 지침을 주는 것이 우리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리다. 우리는 가치있거나 또는 한탄할 만한 인격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망칠 수도 있다.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낱낱의 인격과 맺는 관계를 초월해 있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작은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40년쯤 전 남쪽 버몬트에서 살 적에 여러 친구들과 식탁에 둘러앉아있을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훌륭한 여성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한 평화사업에 대해 꽤 많은 얘기를 했다. 나는 그 이야기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일인칭 대명사가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한 가지 모험스런 제안을 했다.
"하루 종일, 아니면 한 시간, 아니 지금같은 식사 시간만이라도나‘라는 말을 하지 않고 지낼 수가 있을까요?"
모인 사람들은 재미있는 실험이 될 거라고 동의했다. 우리들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 문제에 어떤 식으로 접근하면 좋을까 생각하느라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간단한 생각을 표현하는데도한참 생각해야 했고 문장을 다시 짜야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나라는말이 끼여들어 성공할 수 없었으며, 말을 하다가도 규칙 위반이라는 외침으로 중단되곤 했다. 자꾸만 다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서로가 자연스런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 게임은 도무지 안 되겠네요! 이런 식으론 얘기가 끝을 보지 못하
겠어요." 마침내 이것을 게임이라고 부른 한 참석자가 그만하자고 말했다. 나는 이 기억할 만한 식사 모임에서 우리가 나날의 대화에서 얼마나자기 중심으로 되어 있는지, 우리 삶 속에 얼마나 많은 ‘나‘가 있는지배우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 스스로도 대화 속에서 일인칭을 떼고 말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할 수 있는지실험해볼 것을 권한다. 여러분은 벙어리처럼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마련이다.
도대체 이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우리는 우리 몸을 나의 것‘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 몸 속에서 살지만 몸이 곧 우리는 아니다. 우리 삶에서 내내 확대되고 중심을 이루는 이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우리는 삶이라는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부분들이다. 유일한 실재는전체성 (oneness)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로서의 자의식이다. 몇몇 사람들만이 그 자의식에 눈을 돌리지 않거나 무관심하다. 우리는 과연 자기 중심(self-centered)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 자기 중심주의를 뿌리뽑을 수 있을까?
이제 나 자신도 똑같은 문제에 부딪히고 있음을 알고 있다. 회고록의저자로서 수많은 일인칭 대명사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최선의 삶을살고, 배우고, 사랑하고, 마감하는 것에 관한 이 이야기를 쓰면서 계속되는 나‘, 나‘, ‘나‘ 일인칭 단수대명사를 어떻게 이야기의 뒷전으로밀어넣을 수 있을까?
인도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강연자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Khrishnamurti)는 말년에 한 강연에서 경탄할 만하게 비인칭으로 말했다. 그 자신 또는 자신의 경험을 얘기할 때 나‘라는 말 대신에 ‘연사‘가이런 일을 했다거나 ‘연사‘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스코트는 자기 책이나 강연에서 나라는 말을 드물게 썼고, 보통 대화에서도 되도록 적게 쓰려고 애를 써서 나중에는 거의 쓰지 않게 되었
으며 대화 전체에서 공동체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이는 자기 손으로 땅을 파고 흙을 퍼내어수천 번 외바퀴 수레에 담아 농장으로 나르며 만든 연못도 언제나 ‘우리연못‘이라고 불렀다. 농장도 대부분 그가 심고 가꾸었지만 언제나 ‘우리 농장‘이라고 불렀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도 온갖 수고를 다 해지은 집인데도 그의 집이나 우리 집이 아닌 ‘헬렌의 집‘이라고 불렀다.
나는 개체적 자이를 넘어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살았으면 한다.
스코트나 나도 우리 책 속에서 우리의 내면 생활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우리 둘 다 대부분 대중의 눈에 드러난 삶을 살긴 했어도 눈에 띄지 않는 사람으로 있기를 더 좋아했다. 스코트가 자서전을 쓰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은 자서전이 지나치게 자기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서전을 쓰도록 설득하기 위해서는 대변혁을 겪은 한 세기에 걸쳐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역사적인 면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이는 정치적 성격을 띤 자서전을 썼다. 나는 무심코 그 중 여섯줄을 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책을 스코트에게 바치면서 그이에 관한 추억을 더듬어보니, 우리가 만나기 전의 내 삶의 일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의 일부는크리슈나무르티와 관련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하지만 내삶은 50년 넘게 스코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으므로 이 책은 스코트에초점을 맞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내 삶에서 태양은 오직 하나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또 그렇게 떠났으며, 곧 시야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사람은 10대에 내 눈을 부시게 하였으나, 잠깐동안의 에피소드로 그쳤다.
삶은 모든 사람에게 운 좋게 거머쥐거나 잘못 빠지기 쉬운 기회와 함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능성의 그물망이다. 모든 존재, 모든 행위는거대한 현시 ()의 부분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존재의 모든 순간을
통해 자신의 음표, 노래를 더해주며 이바지한다. 우리는 우리 삶을 꾸려감으로써 그 표적을 남기는 것이다. 지금부터 백 년 뒤의 세상이 어떻게되든지 우리들 저마다의 존재 양식, 행위, 생각에 어떤 부분이든 영향을받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와 형제 자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해온 남편 스코트 니어링과 나 자신이 함께 또는 따로 새겨온 표적들이 세상의 모습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들의 삶, 그리고 아마도 이책을 읽을 여러분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왔을 것이다.
좀더 너그럽고 내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3인칭으로 썼다. 그런데 유능한 편집자들이 권고하기를 독자들과 가까워지고 다정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나에게‘, ‘나는‘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애썼지만 편안하지가 않았고 주제넘은 듯 여겨졌다. ‘나‘를 적어넣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나를 싫어하며, ‘나‘와 상관없이 남은 여생 (이 책을 쓰는동안을 포함하여)을 보내면 행복하겠다. 그래서 전문가의 충고를 따르지않고 헬렌과 스코트의 이야기를 ‘그 사람‘ 또는 ‘그들‘ 이라는 시점으로 거리를 두고 쓰기를 고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마침내 장애에 부딪쳐 나를 쓰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1단 기어와 3단 기어를 왔다갔다하듯1인칭을 앞뒤로 옮겨가며 쓰는 방법을 택했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이 책은 이처럼 하찮은 개체성을 넘어서려고 애쓴 뒤의 ‘우리‘와 나‘에 관한 책이다. 내가 때때로 1인칭을 견디지 못하고 ‘그 사람‘ 또는 ‘헬렌‘을 쓰기 위해 3단 기어를 넣더라도 여러분들은참고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이 책 속의 열려진 창에 크리슈나무르티와의 짧은 만남이 소개되지만,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스코트 니어링과 나의 관계, 우리의 닮은꼴 생활에관한 것이다. 이 책은 스코트와 내가 같이 쓴 다른 책처럼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공동작업, 농장생활, 식생활, 정원 가꾸기 또는 집짓기에 관한 보
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반세기 넘게 함께 하고자 애써온, 최선의 삶을 살고, 그 삶을 사랑하며 우리가 겪은 여러 가지 출발과 떠남에관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제목 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 의 첫 단어Loving‘ 다음에 쉼표를 찍어야 한다. 
최선의 삶을 사랑하는 것(lovingthe good life)도 중요하지만, 
최선의 삶에 들어 있는 그 특유의 변할 수 없는 요소는 바로 
사랑(loving)이기 때문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