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어머니는 "가난을 정면으로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이런 특이한 발랄함"을 치를 떨며 경멸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나‘는 "억센 푸성귀처럼 청청한 생기"(p. 13)에 넘쳐 있는이들과 어울려 살면서 가난을 "소명"으로 삼은 채 살아나간다.
가족들이 죽기 전부터도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번 것은 ‘나‘였다. 대학생 상훈이 ‘가난 체험‘을 위해 ‘나‘를 속이고 가난한 노동자 행세를 하며 동거 생활을 하는 기만적 행동을 하기 전까지
‘나‘는 살아남은 자의 긍지인 가난을 누구에게도 빼앗긴 적 없다. 그러나 그가 가난을 훔쳐간 후 "나에게 있어서 소명"(p.29)이었던 가난은 "무의미한 황폐" (p. 31)로 전락하고 만다. 상훈이 ‘나‘에게서 앗아간 것은 기실 가난만이 보증할 수 있는 삶을향한 ‘나‘의 매혹이기 때문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버는 젊은 여주인공들의 ‘소녀 가장콤플렉스‘는 『나목』의 이경을 상기시키는 「공항에서 만난 사람」과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주인공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가장 뚜렷한 소녀 가장 캐릭터는 「환각의 나비」에 등장하는 두 딸 ‘영주‘와 ‘자연 스님‘이다. 둘은 전혀 다른 듯 닮은 인물들로,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생계를 담당해왔다. 어렵사리 대학의 전임 자리에 취직이 된 영주는 어린 시절부터 하숙집을경영하는 엄마의 동지였고, 처녀 보살로 이름났던 절집(점집)의 자연 스님(속명 마금이) 또한 어려서부터 "집안의 유일한 돈줄"(p.324)이었다. 지금의 절더는 6.25 난리 통에 부역을 한 어떤 가족이 몰살을 당했던 ‘흉가‘인데, 몰살당한 주인의 살아남
은 동생이 그곳에 터를 잡자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네가음흉한 계획을 세워 마금이를 그 집 잔심부름꾼으로 보낸 것이말하자면 ‘신의 한 수‘였다. 마네의 계획(?)대로 그는 열네 살의 마금이를 범하고 이를 안 마금네가 그를 협박하면서 마침내그 집은 마금이네 차지가 된 것이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주인공도 전쟁 중 오빠가 비명에 간 이후 후유증을 앓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미군부대에 취직하여 식구들을 부양한 경험이 있다. ‘나‘도 오빠를사랑했지만 "오빠를 따라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살고싶었다" (p.206). 어머니와 올케가 ‘나‘의 결혼 결심을 축하하기보다 괘씸하게 여긴 것은 ‘나‘의 노력으로 그사이 집안에 꽤 목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딸을 밑천으로 삼거나 딸의 적극적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다소 무기력한 가족들의 모습은, 살아남은 이는 ‘명랑해도된다‘고 말하려는 작가의 반대편에 사뭇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러나 작가 박완서는 젊은주인공들로 하여금 죽음에 저당 잡혀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목』의 이경이 말한바 ‘미치지 않을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春秋
복원의 꿈
이제 우아하고 기품 있는 중년 및 노년의 인물들과, 생기와재미를 갈구하는 젊은 주인공들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들을 보자. 거기에는 왕년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신이 피폐해진 노인, 잔뜩 위축된 노인, 겉보기에는 고상하지만 위선을 일삼는 노인, 진실보다는 편의를 취하는 중년의 인물들이있다.
「침묵과 실어」의 주인공 정해철은 잡지사 주간인 동시에이류 작가이다. 편집회의에서 경영주의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무리하게 도출한 그는 자신의 비굴함에 괴로워하던 차에 윤상하 선생 댁을 찾아간다. 정해철은 "의식이 있는 침묵" (p.100)을 동경하되 실천은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상태이다. 그런 그가 오래전 윤상하 선생의 이름을 딴 ‘상하문학상‘ 수상을 거절한 적이 있다. 오랜만에 윤상하 선생을 방문해, 윤상하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으며 자신이 수상을 거부했던 예전 사건을 상기시켜 "노인의 노여움을 애걸" (p. 107) 해보러 한 것이다.
잡지사에서 무너진 자존심을, 자신이 썼던 멋진 수상 거부의 변을 떠올리면서라도 다시 세워보려는 속셈이다. 그러나 윤상하선생은 중풍에 실어증까지 겸한 환자가 되어 바보같이 "무진장흘러내리는 웃음" (p. 108)만 지을 뿐이다. 정해철의 입장에서윤상하 선생은 정해철 자신을 위해 끝까지 고약한 ‘친일 문인‘
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변명도 하고 증언도 하고 특히 자신을
향해 분노해야 했다. 윤상하의 실어증은 정해철의 ‘침묵‘을 한없이 비굴하고 나약한 지식인의 몸짓으로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다. 일제 말의 암흑기에 변절했던 윤상하와, 친체제적 편집장으로 살고 있는 정해철은 비루함을 공유한 중년과 노인의 어떤전형들이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의 경우에는 ‘나‘가 꿈꾸는 과거의 온전한 복원을 가로막는 대표적 세 인물이 등장한다. 해방기에 서대문형무소에 잠시 수감되었던 친구 혜진, 송사묵의 부인을 문전박대했던 백민세, 아버지 송사묵이 납북된 것이 아니라 사형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체하는 장남. 이 중에서도
‘나‘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백민세 옹이다. 해방기에도 그랬고지금도 그는 그 무엇에도 연루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가 "우아하고 고상하게 늙은 노인"(p. 189)으로 보임에는 틀림없지만그는 그런 얼굴을 하고 여전히 시침을 뗀다. "누구나 빠져나갈구멍 먼저 마련해놓고 있었다. 진실이 마치 함정이나 덫이라도된다는 듯이" (p.192).
고교 시절 박완서의 국어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을 모델로한 작중 인물 송사묵‘은 부역자로 밀고당해 서대문형무소에서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시절을 통째로 지워버리고싶어 하는 혜진이나 백민세 옹은 그렇다 쳐도, 아버지의 죽음을똑똑히 기억하는 장남까지 송사묵을 ‘납북자‘로 분류하는 데 왜
저항하지 않는가?
네에, 그거요. 납치당하신 것처럼 말하는 것 말이죠. 그건 우리 식구의 말버릇이죠. 사형이나 옥사보다 얼마나 듣기 좋아요.
[・・・・・・] 좋은 일에선 특별나고 싶을지 모르지만 나쁜 일일수록다수의 편에 서는 게 그나마 편하거든요. 일종의 자구책이죠.
불행해진 것도 억울한데 홀로 특별하게 불행해지는 거라도 면해보자는. (p.191)
자신의 가족사가 ‘특별한 종류의 불행‘으로 기록되는 것만은 막고 싶다는 장남의 발언에서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어떻게 복원하느냐‘라는 무거운 질문이다.
복원에 대한 ‘나‘의 욕망은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된다. 그런데
‘나‘는 왜 그토록 진실 찾기에 목말라하는가?
박완서의 문학과 생애가 그에 대한 해답 찾기의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어떨까? 복원이란 ‘원래대로 회복함을 의미한다. 그
‘원래‘의 상태란 어쩌면 가까운 이들이 ‘흉한 죽음‘을 겪기 이전의 삶일 수도 있고, ‘흉한 죽음‘에 얽힌 억울한 사연 그 자체일 수도 있으며, 가족과 지인의 ‘흡한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남은 이들이 절실히 추구하는 생기 있는 삶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 책에 묶인 박완서의 소설들에는 복원의 꿈을 좇아 헤맸던 작가의 모습이 고르게 투영되어 있다. 인간은 시간과 마찰하면서늙고 병들지만 바로 그 때문에 빛나고 아름답다는 것이 박완서
문학이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라면, 복원이란 그 마찰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마찰 ‘때문에‘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연이어 던져진 메시지일 것이다. 허물어지는 것이 있기에 복원의 꿈도 생겨나는 법, 늙어가는 인간은 견고한 물건보다 우아하다. 소멸과 복원의 꿈을 동시에 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