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꼬마가 목격한 전쟁이란 처절한 굶주림이었다. 배고픔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나약하다는 사실을 꼬마도 느꼈던 길까. 고구마를 얻어먹으며 머리를 조아리던 병사들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돌아가는 노래 (할망의 표현에 의하면)‘를 합창하며 마을을 떠나갔을 때, 아마도 할망은 그중 몇몇을 향해 작게 손 흔들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 보는 것이다.
할망이 말한 ‘그보다 더 몹쓸 짓‘은 해방 후 삼 년이 지난 194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할망의 마을은 웃뜨르(중산간 마을)라 해서 4.3의 주된 희생지역이다. 지옥 같은 나날들은 몇 해나 계속되었다. 언젠가 집으로 찾아온 ‘무장대‘가 쌀과 쇠를 얻어가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군경(軍警) 토벌대‘의 진압에 맞서 싸우던 무장대는 대부분 제주 출신의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폭도‘, ‘빨갱이‘라 불리던 그들에게 쌀을 준 사실이 발각되면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던 시절이다. 심지어 그들을 본 적이 없는데도 폭도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무장대 청년들에게 노란 쌀을 나누어 주며 어머니는 "제발 홀리지 말고 흔적 없이 가주십사." 하고 사정을 했다. 지금이니 이런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한다지만 당시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망은 ‘폭도가 와서 먹을 것을 앗아갔다‘는 말이 아닌 ‘청년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렇듯, 4.3을 경험하고 이야기하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폭도‘라는 말은 겹겹이 가려져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 같은
실체다.
누가 누구와 싸웠는지, 왜 싸우는지조차 몰랐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일치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름이 존재한다. 해안가에 살던 사람들은 중산간 마을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폭도‘라 하기도 했고 많은 할망들은 지금도 무장대를 ‘폭도‘라 부른다.
또한 검은 옷을 입고 마을에 나타나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던 경찰을 ‘검둥개, 노란 옷을 입고 사람들을 괴롭히던 군인을 ‘노랑개‘라 칭하던 할망을 만난 적도 있다.
4.3이 ‘아직 쓰이지 못한 현대사‘인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다. 한 줄기의 역사로 정리되지 못한 단어들이 서로의 가슴에 칼을 후비는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말하지 못하는 사연을 지닌 채 한 맺힌 노년을 보내고 있는섬의 노인들이 허다하다.
할망의 기억 속에 또렷이 존재하는 무장대 청년들은 어머니에게 고구마를 얻어가던 굶주린 일본군 병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터이다. 그러나 상황은 훨씬 참혹했고 불쌍한 것은 할망을 포함한 마을 사람 모두였다.
군경 토벌대는 마을의 집을 모조리 불살랐으며 죄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밑으로, 해안가로 내려가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경찰의 말에 사람들은 밑으로 내려가다가 토벌대에게 총살을 당했고 젊은이들은 산으로 올라가야 산다고 산을 오르다 죽었다.
위로도 아래로도 가지 않은 사람들은 동굴에 가 살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서로가 어디에 간 줄도 모르게 뿔뿔이 흩어져 몇 년을 버텼다. 할망의 부모는 밑으로도 위로도 가지 않은 채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몸을 숨기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